간다라 예술 : 동 · 서양 문화가 뒤섞인 혼혈의 귀염둥이
“초월적 존재” 는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다 믿었던 동양적 사상으로 부처의 열반 이후 약 500년 동안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을 인간으로 표현했던 그리스 신상 문학의 영향으로 무불상 시대를 지나 손모양, 옷주름, 구불거리는 머리모먕 등 많은 부분이 그리스 신상과 흡사한 최초의 불상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건이 간다라 미술의 시작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인종,문화, 종교의 화합이며, 생명의 울림이다. “너희의 신은 어디 있느냐?” “우리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 마음 속의 신을 꺼내어 만들어 보아라. 그러면 너희는 그와 늘 함께 하리라.” |
▲스왓 계곡에 있는 쿠샨 시대의 유적
인도의 불교와 헬레니즘 예술 (Hellenistic Art: 헬레니즘 시대는 일반적으로 마케도니아 국왕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즉위 하기까지의 시기 (기원전 323~기원전 30년) .이때문에 넓은 의미의 헬레니즘 예술도 또한 헬레니즘적 로마 예술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식 불교예술 (Graceco-Biddjost art), 로마식 불교 예술 (Roman-Buddhist Art’) 혹은 ‘그리스 -로마식 불교 예술 (Graceo-Roman-Buddhist Art)이라고 불린다.
간다라 미술
간다라는 고대 인도의 서북부에 위치 했으며, 지금의 파키스탄 페샤와르(Peshawar)일대에 있었는데, 인더스 강과 카불 강 (Kabul River) 사이에 끼여 있다. 간다라파로서의 간다라가 포괄하는 범위는 그러한 역사 지리적 실제 영역을 훨씬 초과하여, 지금의 파키스탄 서북 지역과 거기에 인접한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에 해당하는데, 인더스 강 서쪽의 페샤와르 계곡을 포괄할 뿐아니라, 인더스 강 동쪽의 탁실라 (Taxila) 북쪽으로는 스왓 계곡(Swat Valley),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강 유역 상류의 하다 (Hadda) 등지도 포괄한다.
간다라는 서북쪽의 문호여서, 외족이 침입할 때 반드시 지나는 지역이었으며, 인도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지중해 세계를 이어 주는 연결 고리이자,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합류하는 교차료였다.
간다라는 고인도의 16열국들 중 하나로, 리그베다( 사마베다, 아주르베다, 아타르바 베다) 시대에 이미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6세기 후반 무렵, 간다라는 페르시아 제국인 아케메네스 왕조의 행성 으로 전락했다. 기원전 326년에 간다라는 다시 마케도니아의 국왕인 알렉산더에게 정복 되었으며 알렉산더의 부하 장수 였던 셀레우코스의 관할에 귀속되었다.
아소카왕은 인도의 고승인 맛잔타(Majjhantika)를 간다라 지역에 보내 불교를 전파하고 불탑을 건립하여, 훗날 인도 불교와 헬레니즘 예술이 융합하기 위한 기초를 다졌다.
박트리아 왕국
박트리아(bc. 246-138)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조로아스터교의 발상지이자,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넘어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가는 데 거점 역할을 한 지역이기도 하다. 박트리아는 알렉산더가 박트리아에 정착시켰던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로 중국에는 대하국이란 이름으로 전해졌다. 메난드로스(밀란다) 왕의 등장 이후 불교와 그리스인의 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레코-부디즘은 불교의 예술 발전, 즉 간다라 미술의 등장과 대승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
박트리아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양식에 따라 간다라 오래된 나라의 옛 도읍인 탁실라의 시르캅 (Sirkap)에 새로운 성을 다시 건립했다. 박트리아 그리스인 국왕인 메난드로스( 밀린다)라고도 불리는데, 일찍이 인도의 고승인 나가세나 비구 (Bhikshu Nagasena)와 불교의 교의에 대해 토론하고, 후에 불교 명저인 ‘밀린다팡하’혹은 ‘미란타문경’를 편찬하였다. 또 메나드로스가 발행한 주화 위에는 불교의 상징인 법륜을 새겨 놓았다.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로 인해 박트리아는 간다라 예술의 요람으로 변했다. 간다라는 다시 이란 북쪽에 거주하던 파르티아 왕국의 파르티아인들에게 점령당했다. 사카인과 파르티아인들은 모두 헬레니즘 문화를 좋아했다. 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했는데, 간다라를 침입한 후 박트리아 그리스인처럼 불교에 감화되었다.
▲사카-파르티아 시대 (기원전 85~서기 60년)에 건립된, 탁실라의 잔디알에 있는 배화신전의 구조는 그리스 신전과 유사하다.
탁실라의 시르캅, <쌍두독수리 스투파 (Stupa of the Double-headed Eagle> 사각형 기단의 측면 벽 위에 코린트식 (Corinthain)의 잎사귀가 무성하게 새겨진 주두를 가진 벽주로 분할하여 벽감을 만들어 놓았다.
간다라 예술의 번영은 쿠샨 시대 (Kushan Period, 1~3세기)
쿠샨인 (Kushans) 은 원래 중국 돈황에 기련산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민족인 월지의 한 갈래이다. 기원전 2세기에, 월지는 흉노의 핍박을 받아 서쪽으로 이주했는데, 대략 기원전 130년경에 옥수스 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박트리아를 점거했다. 1세기 초엽에, 월지의 5부락 흡후의 한 명이던 쿠샨 흡후 쿠줄라 카드피세스 (Kujula Kadphises) 가 월지의 각 부락들을 통일하여, 카불 강 유역에 큐샨 왕조를 건립했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제 1쿠샨 왕조라고 부르며, 중국의 역사서들에서는 이를 대월지라고 부른다.
쿠샨의 전성기 통치자였던 카니슈카(대략 78-144년 ) 국제 학계에 서기 78년 , 128년 144년 이라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아직 정설은 없다. 동인도의 갠지스 강 중류 유역을 정복하여, 그 세력이 멀리 베나라스까지 미치자, 쿠샨의 통치 중심을 중앙아시아에서 간다라 지역으로 옮겨, 루루샤푸라(지금의 페샤와르) 를 수도로 정했는데, 제 2 쿠샨 왕조 가 중앙아시아를 재패하고, 인도 북부에 군림함으로써, 쿠샨 제국으로 하여금 중국. 로마.파르티아와 나란히 당시 세계 4대 강국의 하나가 되게 하였다.
간다라는 중국과 로마 간에 통상하던 ‘실크로드’의 환승역으로서, 동.서양 무역과 문화 교류의 중심이었다.
수많은 로마의 유리 그릇. 청동상과 석고 부조및 중국의 칠기와 인도의 의자 등받이 장식 상아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무역과 문화 교류는 간다라 예술로 하여금 더욱 직접적으로 헬레니즘적 로마 예술의 영향을 받도록 하였다.
쿠샨 제국의 광대한 영토에서 다른 신앙을 가진 수많은 민족들에 대한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카니슈카는 또한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를 비호한 ‘제 2의 아소카 왕’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탑문 아래에서 화장하는 여인, 상아, 국립박물관 상아 조각 거울 손잡이, 1세기 포메이출토
1세기 혹은 2세기, 베그람에서 출토, 카불박물관 나풀리 국립박물관
인도의 파탈리푸트라를 정복할 무렵에, 인도의 불교 철학자 이자 시인인 아슈바고사(Asvaghosa), 즉 불소행찬의 작자를 쿠샨의 궁정으로 초빙했다고 한다. 카니슈카 시대에, 카슈미르(Kashmir)에서 불교 경전의 제 4차 결집을 소집하고, 간다라 지역에 대량의 불탑 사원들을 건립, 아울러 그리스.로마의 신상들을 모방하여 대량의 불상과 보살상들을 조각하였다.
페샤와르 근교의 샤지키델리에 있는 카니슈카 대탑은 궁정 장인인 아게실레스 (Agesiles: 아마도 그리스인의 후예이거나 유럽인과 이시아인의 혼혈인 것 같다)가 감독하여 만들었다.
◀<카니슈카 사리 용기>청동, 2세기, 페사와르 박물관
카나슈카 사리용기 왼쪽에는 인드라와 범천의 입상으로 조형은 치졸하고 작달막하며 굵다. 불상의 몸에는 통견식 승의를 걸치고 있는데, 옷의 앞자락은 책상다리를 하여 틀어 올린 두 다리를 가리고 있고 (가부좌에 능숙하지 않았다) , 오른손은 시무외인 ( 불교에서 부처나 보살이 취하는 여러 가지 수인들 가운데 하나. 이 수인은 부처가 중생들에게 두려움을 없애 주기 위해 취하는 자세, 구체적인 모습은 오른손을 구부려 어깨 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게 한다. 그 자세가 마치 어떤 물건을 주는 듯하며, ‘이포와인’이라고도 한다.
머리 뒤쪽의 광배 위에는 활짝 핀 연꼿을 새겨 놓았다. 뚜껑의 측면은 백조(거위)들로 한 바퀴 장식해 놓았다. 용기의 몸통 위에는 일렬로 어린 사랑의 신들이 뱀처럼 생긴 화승(무늬가 있는 밧줄)을 어깨에 메고 있는데, 화승 위에는 불좌상과 페르시아의 일신과 월신이 새겨져 있다. 일신과 월신사이에는 융장(전투복)차림에 장화를 신은 쿠샨의 국왕이 서 있는데, 그 형상이 카니슈카 금화위에 새겨진 국왕의 모습과 비슷하다.
◀<카니슈카 금화> 황금, 1세기 말엽 혹은 2세기 초엽 , 보스턴 박물관
전신에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우두머리의 융장 차림을 하고서, 불의 제단 옆에서 창을 들고 도도하게 서 있다. 금화의 뒷면에는 헬레니즘 풍경의 불입상이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그리스 문자 명문인 ‘Boddo’ 부처를 새겨 놓았는데, 이 소형 불상은 이미 간다라 불상의 일반적인 조형 특징을 갖추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 사산왕조의 샤루르 1세가 간다라를 침입하여 페샤와르를 함락시키자, 쿠샨 제국은 이로 인해 와해되었다. 키다라 쿠샨인들이 쿠샨의 잔여 세력을 부흥시키면서, 간다라 예술도 절멸되지 않고 이어지게 되었다.
대략 465년에 ‘불교를 믿지 않는” 에프탈족 (백흉노)이 간다라 지역을 침입하여 수많은 불탑 사원들을 파괴하자, 간다라의 불상과 보살상들도 찾는 사람이 드물어졌으며, 점차 역사의 먼지 속에 묻혀 갔다.
1949년 영국인이 가장 먼저 펀자브에서 간다라 불상을 발굴해냈다. 20세기 이래, 영국령 인도. 프랑스.이탈리아.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미국.소련.일본 등의 고고대들이 잇달아 간다라및 그 인근 지역에서 고고 발굴을 진행했다. 간다라 예술은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산물이기 때문에, 특히 불상의 기원이라는 중대한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동.서양 학자들이 백 년 이상 연구하고 토론하며 논쟁하도록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20세기 이래, 영국령 인도. 프랑스. 이탈리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미국. 소련.일본 등의 고고대들이 잇달아 간다라및 그 인근 지역에서 고고 발굴을 진행했다. 동 서양 학자들이 백년 이상 연구하고 토론하며 논쟁하도록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헬레니즘 풍격의 간다라 불상
쿠샨 시대 간다라 예술의 가장 큰 공헌은, 바로 헬레니즘 풍격의 간다라 불상을 창조했다는 점이다.
불교 조삭들은 모두 부처의 형상을 묘사하지 않고, 보리수.대좌.법륜.발자국등 상징 부호로만 부처의 존재를 암시했을 뿐이다. 쿠샨시대는 바로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변화하는 단계에 놓여 있었다.
부파 불교의 대중부 지파가 변화 발전해 온 대승불교는, 자아의 해탈을 추구했을 뿐아니라, 또한 일체 중생의 제도를 표방 했다. 원시불교의 소박한 무신론을 위배하고 브라만교의 유신론 사상을 흡수하여 일종의 새로운 유신적 우주론을 형성했다.
원시불교의 교의를 고수하는 지파를 구분하여 소승이라고 폄하하여 불렀다.
우주의 유일한 실재이자 최고의 본체인 ‘여래’를 지고 무상의 신으로 여겨 숭배해 왔으며,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단지 여래의 수많은 일시적인 화신들 중 하나일 뿐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구세주이자, 신격화된 초인 혹은 인격화된 신이라고 여겼다. 부처를 신격화화하고 인격화한 관념은, 간다라 지역에서 수백 년 동안 유행했던 헬레니즘 문화의 ‘신인동형: 신과 인간의 모습이 같음) 의 조형 전통과 꼭 부합한다. - 그리스의 신들은 모두 인격화된 신이다. (그리스인들은 건강미 넘치는 인체를 모방하여 신의 모습을 묘사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로마인들도 그리스인들이 사람 모습을 한 신상을 조각하던 전통을 계승했다. 로마인들도 그리스 인들이 사람 모습을 한 신상을 조각하던 전통을 계승했다.)
쿠샨 시대에, 카니슈카가 시행했던 종교에 대한 관용.절충.조화의 정책 하에서, 간다라 예술가들은 누구였을까?(일부 지중해 세계인 그리스.로마나 소아시아에서 온 장인들)
헬리니즘 풍격의 간다라 불상이 탄생한 이유: 인도 초기불교 조각의 불합리한 계율에 조금도 구애되지 않고 그리스.로마 조각의 관례를 따르기 시작했으며, 그리스.로마 신상의 견본을 모방하여 직접 부처 본래의 사람 모습을 한 형상을 조각해 냈다.
쿠샨 시대 간다라 스투파의 형상과 구조에는 이미 변혁이 나타났는데, 중인도 스투파의 울타리와 탑문은 사라지고, 그것을 복발과 기단을 둘러싸는 벽주와 벽감으로 대체했다. 복발은 눈에 띄게 높아졌으며, 산개에는 7층 이상에 달하는 하나의 긴 상륜에 덧붙여 놓았다. 벽감 안에는 불상.보살상을 모셔 놓았다. 간다라 지역의 대탑들은 이미 모두 사라지고 남아 있지 않다.
◀<봉헌탑, 대략 4세기 혹은 5세기, 탁실라>
탁살라의 모흐라 모라두(Mohra Moradu) 사원에 잔존해 있는 하나의 봉헌탑과 아프가니스탄의 비마란에서 출토된 루비가 박힌 사리 용기에 근거하면, 간다라 지역 대탑의 형상과 구조 및 부조 감판고 벽감 불상의 배치를 추측해 볼 수 있다.
간다라 불상의 조각은 대략 1세기 후반에 불전고사 부조에서 시작되었는데, 점차 단독으로 불감 (집이나 방에 불상을 모시는 작은 불당)을 설치하여 예배하는 불상을 모시는 것으로 발전해갔다. 주로 사람의 모습으로 출현하는 보살 등의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바르후트나 산치의 부조에서 흔히 보이는 야생동물과 삼림 등의 장면은 매우 적게 묘사 되어 있다.
◀<황금 사리 용기>
대략 2세기, 아프가니스탄 비마란에서 출토
런던 대영박물관
◀<시비와 본생>, 편암 대략 2세기, 런던 대영박물관
간다라의 편암 부조인<시비왕 본생>은 상당히 사실적인 기법으로 부처의 전생의 화신들 중 하나인 시비왕이 살점을 떼어 내어 할미새와 교환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왼쪽 가장자리는 바로 살점을 떼어 내어 할미새와 교환하는 사람이 시바왕이며, 오른쪽 가장 자리는 손에 금강저를 들고 있는 제석천과 고행자 차림을 한 범천인데, 인물의 조형이 그리스인이나 중앙아시아인애 가깝다.
◀<삼십삼천으로부터의 강생, 3세기>
불전고사 부조들 속에 있는 부처의 형상은 신분이 갓 태어난 어린아이이거나, 출가한 태자이거나, 혹은 설법하는 세존(석가의 존칭) 이거나 관계없이 모두 보통의 인물들과 크기가 같다. 그런데 후에 부처의 형상은 갈수록 보통 인물들에 비해 커지고, 갈수록 범인의 영역을 벗어나 성인의 경지로 진입하기 때문에, 불전고사 부조에서 독립되어 떨어져 나와, 단독으로 감실을 만들어 놓고 예배 드리는 불상으로 넘어간다. 범천과 제석천의 두 협시가 모시고 내려오는 부처의 형상은 세 번 중복하여 출현하는데, 이는 그가 천국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간다라 불상의 조형은 인도 불교의 영감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주로 헬레니즘 예술의 형식을 채용하고 있는데, 특히 쿠샨 왕조와 시대가 같은 로마 제국 예술을 참조했다. 즉 헬레니즘예술의 사실적인 인체에 인도 불교의 상징적인 징표들을 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다라 불상을 전체적으로 보면, 그리스 태양신인 아폴로 (Apollo)나 그리스.로마 시대 철인의 머리에, 로마 시대 의 긴 두루마기인 ‘토가’를 걸친 몸, 그리고 몇 가지 부처를 상징하는 인도 위인 (Mahapurusha) 신분의 용모 특징이 혼합되어 이루어
져 있다. ‘아폴로식 불상’혹은 ‘토가를 입은 불상’이라고 불리는데, 부처가 사람의 형체와 초인의 내면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동시에 나타내 준다.
부처의 초인적인 정신의 내면을 상징: ‘삼십이사’ 그 가운데 몇 가지 오묘한 모습들이 부처의 조형에 사용되었다. ‘머리위에 있는 육계 (ushnisha: 태어날 때부터 왕관을 쓰고 있어서 자라난 혹으로, 비범한 지혜를 담고 있다).
눈섭 사이의 백호 (urna): 지혜의 빛을 비추는 털
동양의 불교 성자와 서양의 기독교 성자에게 동시에 부여되었다.
특징: 머리부위: 아폴로식의 그리스 미남자 얼굴 모습
얼굴형: 타원형
이목구비: 단정
눈썹: 가늘고 길며 휘어져있음.
눈: 깊숙한 모습
입술: 얇다.
콧날: 곧게 솟아 있고 이마와 연결되어 있어 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직선을 그어 놓은것 처럼 보인다. 전형적인 그리스인의 코와 닮았다.
옷: 통견식 승인의 승가리를 입고 있으며 가끔 단우견식 승의를 입은 불상
간혹 콧수염이 있는것도 있다.
승의: 로마의 두루마기인 토가와 유사하며, 사실적인 기법으로 새겼기 때문에 털의 질감이 분명
옷의 주름: 두툼하면서 묵직,
옷의 구김살: 겹쳐져 있는데, 옷의 움직이는 자세와 중량의 변화에 따라 몸에 달라붙어 있다.
간다라 불상의 전체 몸의 비례: 일번적으로 대략 6 등신이거나 5등신, 몸집이 짧고 뚱뚱하여, 그리스.로마 조각의 비례가 조화로운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데, 이는 간다라 불상의 일반적인 단점이다.
얼굴표정: 수수하면서 고귀하고 냉정
눈: 반쯤 감겨져 있다. 마음속으로 깊이 성찰하는 정신적 요소를 강조
이는 간다라 불상의 일반적인 단점이다.
재료: 청회색 편암: 색깔이 어둡고 침착하며 냉엄하여, 불상의 예스럽고 소박하며 장중하면서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증대시켜준다. 이집트.그리스.중국 등 수많은 나라들의 고대 조각은 대부분 색이 입혀져 있었듯이, 간다라 불상도 원래는 색이 칠해져 있었는데, 출토된 불상들은 대부분 색이 이미 벗겨져 버려, 오로지 조각 재료 본래의 색깔만 드러나 있다.
간다라 불상은 입상과 좌상의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인 ‘mudra’(손동작) 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인장. 손동작.표정.자태 등인데, 한역 불경에서는 ‘인’’”수인” ’’수계’’인상’등으로 번역하였다.
인도의 전통 희극.춤.조각 및 회화에서 각종 형식화된 손
동작들은 독특한 어휘를 형성하고 있어, 인물의 내재적인 정신과 감정은 표현해 낼 수 있게 되었으며, ‘육체의 꽃’. ‘영혼의 손동작’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손동작과 앉은 자세는 헬레니즘 예술 세계에서는 알지 못했던 것으로, 순수하게 인도 본토의 전통 문화에서 기원한 것.
◀<간다라 불좌상, 편암, 2세기 ~3세기> 페샤와르 박물관가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회색 편암 조각인 <간다라 불좌상>등의 작품들이 있다. 사리바와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저<간다라 불입상>과 동일한 조각 작업장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고행하는 석가 , (야윈 부처), 편암, 3세기> 라호르 중앙 박물관
1880년에 간다라 지역 시크리의 절터에서 출토된 총회색 편암 조각인 <고행>하는 석가는 <야윈 부처>라고도 불리는데 대략 3세기에 만들어졌으며, 현재 라호르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보살상에 속하지만 통상 간다라 불좌상의 본보기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일반적인 헬레니즘 풍격의 간다라 불상과는 판이하게 , 이것은 고행 수련으로 인해 극도로 야윈 불상인데, 놀라운 인체의 골격 해부 구조로써 석가보니의 인내심이 강하고 의지가 굳은 정신력을 표현해 냈다.
이 조상은 육체의 쇠약하고 추한 모습으로써 정신의 웅대하고 숭고함을 표현해 냈는데, 엄격하고 사실적이면서도 대단히 과장되어 있으며, 냉혹하고 핍진한 조형 수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심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때문에 현대의 동.서양 학자들은 한결같이 간다라 예술의 최고 걸작이라고 추앙하고 있다.
왕자보살과 이역의 신들
◀<왕자보살> 편암,2세기 중엽, 파리 기메박물관
보살을 산스크리트어로 ‘보디사티바’라고 한다. 그 의미는 ‘중생을 깨우치다’ ‘대중을 각성시키다’ 예비 부처 또는 미래의 부처라는 의미이다. 간다라의 보살상은 조형 면에서 불상처럼 과분하게 장중하거나 딱딱하거나 소박하지 않고, 비교적 소탈하고 활발하며 화려하고 비교적 생동감 있고 다양한 자태를 나타낸다.
간다라 보살상 조각들 중 가장 많은 것은 싯다르타 태자이고 그다음은 미륵 보살이며, 또한 소량의 관음 보살도 있다. 간다라 보살상의 조형은 비록 역시 헬레니즘 예술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불상에 비해 인도의 색채가 한층 풍부하며, 일반적으로 인도인과 유럽인의 혼혈인 특징을 띠고 있는데, 온몸에 흐르는 고귀한 풍채와 호화로운 복식은, 마치 쿠샨 시대의 풍모가 빼어난 인도 왕자를 꼭 닮았다. 인도인과 유럽인 혼혈의 미남자와 유사하며, 물결 모양의 콧수염이 나 있다( 아마도 쿠샨인들의 수염을 기르던 관습에서 유래) 머리 뒤쪽의 광환과 눈썹 사이의 백호는 불상과 차이가 없는데, 이는 보살이 불성을 지닌 신성한 신분임을 나타내 준다. 싯다르타 태자의 머리 위에 있는 육계는 진주 보석류로 장식된 두건을 쓰고 있다. 간다라 보살상의 발은 구슬로 장식된 샌들을 신고 있는데 이것도 아마 서양에서 수입된 양식인 것 같다.
◀<미륵보살> 편암, 2세기 중엽, 라호르 중앙 박물관
미륵 보살의 긴 머리는 구슬을 꿰어 장식한 띠로 보통 상투를 묶었고, 머리 뒤에 늘어져 있는 곱슬머리는 어깨 위에 풀어 해쳐져 있다. 간다라 보살상 조각들 중 가장 많은 것은 싯다르타 태자이고, 그다음은 미륵 보살이다.
간다라 보살상의 본보기적인 작품들로는 현재 라호르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회색 편암 조각인 <미륵보살> 과 보스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간다라 보살입상>등의 작품들이 있다. 미륵보살의 특징은 상투를 묶었고, 두건은 두르지 않았으며, 왼손에는 정병(불로장생하는 감로)를 가득 담은 물병을 들고 있다.
카니슈카는 불교를 믿었지만 쿠샨제국의 국경 내에 있는 각종 다른 종교들도 모두 받아들였다. 카니슈카 및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를 제창한 후계자인 후비슈카가 발행한 쿠샨의 화폐 위에는 불상을 주조했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그리스.인도 등 이역의 여러 신들의 형상도 주조했다.
페르시아의 태양신인 미오로(Mioro), 달의 신 마오 (Mao), 바람의 신인 오아도 (Oado), 빛의 신 혹은 태양신인 미트라 (Mihra), 바빌론 출산의 여신인 아나히타(Anahita), 그리스의 태양신인 헬리오스. 달의 여신인 셀레네, 힘이 엄청나게 센 영웅인 헤라클레스, 풍요의 신인 세라피스(Serapis), 인도의 브라만교 대신인 시바, 전쟁의 신인 스칸다-비샤카등의 신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신들 형상은 하나의 측면에서, 간다라 예술이 동양과 서양의 문화 요소들을 융합한 특징을 나타낸다.
<필라스 아테네,이설: 미네르바 혹은 로마 여신) , 대략 2세기, 라호르 중앙박물관 >
그리스의 옛날 의복인 키톤 (소매없는 긴 겉옷), 유두가 드러나 보이는 허리를 졸라맨 겉옷 및 나부끼며 늘어져 있는 주름이 많은 치맛자락은 모두 헬레니즘 예술 세계에서 유래된 것들, 단지 섬세하게 새긴 진주보석류를 꿰어 만든 목걸이만은 인도 특유의 산물인 듯하다.
탁실라에서 출토된 엽암 조각인
<강의 신>
<나일강의 신>Nile River God - 로마 바티칸 박물관
탁실라에서 출토된 엽암 조각인 <강의 신>은 대략 2세기에 만들어졌으며, 현재 카라치 국립 박물관 National Museum . Karachi) 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도 역시 간다라 헬레니즘 신상의 걸작이다. 강의 신은 완전 나체로, 신체와 정신이 웅혼하며, 숱이 많은 머리와 긴 수염이 있는데, 대가리가 떨어져 나간 한 마리의 누워 있는 사자 (아마도 수신인면의 짐승인 스핑크스인것 같다) 에 비스듬히 기대로 있으며, 오른손에는 풍요를 상징하는 양의 뿔 하나를 쥐고 있다.
◀<판치카와 하리티> 편암, 2세기 중엽 , 페샤와르 박물관 , 이것은 간다라의 인도 신상들의 걸작 중 하나이다. 인도의 재물신인 판치카와 그의 아내이자 출산의 여신인 하리타(귀지모)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있다. 한쌍의 인도 남녀 신상은 헬레니즘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 판치가는 머리를 묶고 수염을 길렀으며, 가슴과 팔을 드러내놓고 있는데, 로마 귀족이나 쿠샨의 추장을 닮았으며, 차림새는 마치 인도의 왕자 같다.
간다라 예술의 변화와 동방으로의 전파
간다라 예술은 대체로 전기와 후기 두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는 대략 1세기 초엽부터 3세기 중엽까지인데, 이는 바로 쿠샨 왕조의 통치 시기 (대략 서기 60년 이전은 사카-파르티아 시대에 속한다) 에 해당하며, 후기는 대략 3세기 중엽부터 5세기 말엽까지로, 사산 왕조와 키다라 쿠샨인들이 통치한 시기에 해당한다.
- 전기 간다라예술은 석조가 주를 이루어쓴데, 조각 재료는 주로 간다라 지역에서 산출되는 청회색 운모가 섞인 편암을 채용했다. 이것이 유행했던 지역은 인더스 강 서쪽의 간다라 중심부인 페샤와 르 계곡이 중심이었으며, 스왓 계곡과 엽암이나 편암 조각을 채용했던 탁실라-베그람(카피사)등도 포함되었다.
- 1세기 초엽부터 말엽까지: 파르티아의 헬레니즘 예술 부흥 시기, 탁실라에서 출토된 서양 예술의 제재인 남녀가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는 모습 등을 새긴 부조들은 순수하게 헬레니즘 풍격에 속한다.
- 1세기 후반기 : 쿠샨 시대에 이미 부처의 형상이 출현하는 간다라의 불전고사 부조 들은 비록 헬레니즘 예술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고풍식 풍격에 속한다. 그리하여 조각기법이 비교적 투박하고, 구도는 단순하면서 소박하며, 인물의 조형은 치졸하여, 머리가 지나치게 크고, 두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있으며 자세는 어색하다. 전형적인 것으로는 페샤와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편암 부조인 <브라만 방문>등의 작품들이 있다.
초가집 문 밖에 서 있는 부처의 조형이 고졸하면서 소박한데, 두 둔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며, 콧수염은 굵직하고, 묶어 세운 곱슬머리 모양의 육계는 지나치게 크다. 머리뒤에 있는 광환은 하나의 둥근 테두리고 되어있고, 통견식 승의는 고대 로마의 헐렁하면서 주름이 많은 두루마기와 비슷하다. 부처의 옆에 서 있는 금강역사는 오른손으로 박자판 모양의 금강저를 쥐고 있고, 쑥대강이처럼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있는데, 모습이 날래고 용맹스러워 보인다. 그 조형은 마치 로마의 시종관 같고, 몸에는 상의의 가장자리를 바깥으로 접은, 소매가 없고 허리를 묶은 짧은 겉옷을 입고 있으며, 근육이 발달해 있다. 은거하는 브라만 고행자는 초가집 문 입구의 멍석말이 위에 앉아 있는데, 머리를 묶고 수염을 길렀으며, 이야기 하는 자세가 생동감 넘친다. 초가집 주변의 활엽 사라수는 양식화 기법으로 처리했다.
4. 중기 석조: 대략 1세기 말엽부터 2세기 중엽, 헬레니즘 예술의 영향이 매우 뚜렷이 보이는데, 고전주의 풍격을 나타내며,
조각 기법은 점차 성숙해지고, 구도는 단순하면서 균형 있고 조화롭다. 또 인물의 조형은 간결하고 고귀하면서 조용하고
엄숙하며, 부처의 눈은 반쯤
감 겨 있어 신비하고 초탈한 모습이며, 주름은 두툼하면서도 유앙하고, 자태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답다.
예) 페샤와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편암 부조인 <부처탄생> 3세기 중엽 , 라호르 중앙박물관
5. 말기 석조: 대략 2세기 중엽부터 3세기 중엽까지로, 로마 예술의 영향을 많이받은 것 같은데, 로마 조각을 본받았고 인도 본토 예술의 장식을 선호하는 전통도 더욱 많이 흡수하여, 반 고전적인 절충 풍격을 나타내며, 매너리즘 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조각 기법은 나날이 완전해지며, 구도는 복잡하고 묘사가 자세하며 장식이 과장되어 있고, 인물의 조형은 핍진하여 세밀하고 반들반들하며, 개성과 표정과 동태의 묘사를 중시했다. 페샤와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편암 부조인 <부처열반> 카라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편암 부조 <수마가다를 보호하고 있는 부처> 페샤와르박물관 소장 <제석굴 설법> 라흐르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편암 고부조인 <사위성의 기적>등이 있다.
◀<마라의 마군, 편암, 3세기 중엽, 라호르 중앙박물관>속의 저 괴상한 모습에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치켜세운 마군들은 실제로는 간다라 지역의 많은 민족들이 뒤섞여 갖가지로 변형된 모습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후기 간다라 예술은 이소(진흙으로 빚어 만든 상)가 주를 이루었는데, 소조재료는 석회와 점토가 혼합된 스투코나 테라코타를 채용했다. 이것이 유행했던 지역은 더욱 광할한데, 아프가니스탄 국경 내에까지 펼쳐져 있었음에 비추어, 후기 간다라 예술은 인도-아프가니스탄파’라고도 불린다.
◀<사위성의 기적,편암, 3세기 혹은 4세기 라호르 중앙박물관>,
구도는 여러 가지가 뒤엉켜 복잡하고, 장식은 자질구레하고 번잡하며 화려한데, 부처의 형상은 비할 데 없이 크고 높다. 부처가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 Sravasti에서 신통력을 발휘하여 외도를 항복시키는 기적을 표현하였다. 좌우 협시인 인드라와 범천은 하늘 높이 불당을 들고 있다.
◀<사위성의 기적,편암, 3세기 파리 기메박물관>속에 있는 ‘염견불’인데 불상의 양쪽 어깨 위에서는 불꽃을 내뿜고 있으며, 배광의 주위도 한 바퀴 불꽃으로 새겨서 장식했다.
후기 간다라 예술의 가장 서쪽 중심지, 힌두쿠시 산맥의 서쪽 끝자락 하곡의 마애에 있는 바미얀의 석굴인데 대략 2세기부터 7세기까지 개착되었다. 바이얀 석굴들의 동서 양쪽 끝에 있는 감실형 석굴들 안에는, 각각 사석에 새기고 수투코로 빚은 거대한 불입상. 서쪽 대불은 높이 55미터로, 대략 5세기 초엽에 만들어 졌고, 동쪽 대불은 높이가 38미터, 대략 5세기 후반기에 만들어졌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바미얀의 서쪽 대불은 "금색으로 빛나고 보석 장식이 눈부시다'고 묘사했으며, 또한 동쪽 대불은 놋쇠로 주조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풍화가 심각하여 얼굴부위는 파손되었으며, 아마도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었을 오른손과 숭의를 쥐고 있었을 왼손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애석하게도 이들 두바미얀 대불은 2001년 이미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의해 훼손되었으므로, 우리는 단지 사진 속에서만 대불의 옛 모습을 마주할 수 있을 뿐이다.
바미얀 석굴에 남아 있는 6세기경에 그려진 벽화 가운데 환형, 연주문, 저두문(돼지의 대가리를 형상화한 문양) 쌍조문(두마리의 새)등의 도안들은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직물 문양과 유사하며, 사륜마차를 몰고 있는 태양신과 공양인의 복식도 페르시아의특징을 띠고 있다. 바미얀 동남쪽 약 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카크라크 석굴의 벽화는 대략 7세기 혹은 8세기에 개착되었는데, 그림은 좌불과 천불의 주를 이루며, 색채는 홍갈색.황토색. 군청색 초록색이 주를 이루고 있어 이미 불교 말기의 밀종 예술의 풍격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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