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예술의 황금시대
인도 고전 문화의 전면적인 번영
3세기 중반,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인더스강 유역으로 확대하면서 쿠샨왕조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이틈을 타고 북인도에서는 여러 가문이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마가다 지역의 굽타 가문도 그 중 하나였다. 찬드라 굽타 1세가 통치한 기간은 15~20년으로 추정될 만큼 짧았다. 하지만 그동안 그는 ‘왕 중의 왕’ 이라 불릴 만큼 굽타 왕조가 성장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굽타 왕조는 훈족의 침입을 잘 막아냈으나, 오랫동안 큰 전쟁을 치르면서 국력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왕위를 둘러싼 내부 분열이 심해져 결국 굽타 왕조는 6세기 중엽 인도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훈족의 인도 침입을 계기로 중앙아시아의 다른 민족들 역시 인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일부는 서인도와 남인도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들 이민족 가운데 특히 구르자라족은 지금의 구자라트 지역에 정착하여 후에 흰두교를 신봉하면서 인도인으로 정착했다. ‘구자라트’라는 말은 이들 구르자라족이 정착한 땅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흰두’는 파키스탄을 흐르는 인더스강의 명칭에서 기원한 페르시아어다. 원래 ‘인더스강 유역의 사람들’을 의미했는데, 인도에 침입해온 무슬림이 자신들과 종교를 달리하는 인더스강 유역의 원주민을 흰두라하여 인도인을 의미하게 되었다.
흰두교는 기원전 6세기 ~기원전 4세기에 브라만교가 토착 민간 신앙 등을 흡수해서 크게 변모한 형태를 가리킨다. 흰두교는 특정한 교조에 의해 창시된 것이 아니라, 인도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난 것이다.
흰두교의 신은 무척 다양하다. 세상 만물이 모두 숭배의 대상이 되는데 시대에 따라 변했다.
브라흐마, 비쉬누, 시바다, 브라흐마는 우주 창조를, 비쉬누는 우주의 유지를 , 시바는 우주 파괴를 담당한다. 브라흐마는 중세 이후 세력을 더지 못하고, 오늘날 뷔쉬누와 시바가 믿음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굽타 왕조에 접어들면서 희두교는 크게 발전한 반면, 불교는 쇠퇴했다.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대승불교의 등장은 모순적이게도 불교가 흰두교에 융해되어 주체성을 잃고 독자성을 상실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부처가 비쉬누 신의 화신으로 간주되고 말았다.
320년, 찬드라굽타 1세 (대략 320-335): 굽타의 기원 수도: 파타리푸트라
그의 아들 사무드라굽타 (대략 335-376) :북인도 전체와 중인도의 대부분을 정복, *마제 대전을 거행 하자 원근의 여러 나라들이 잇달아 굴복해 왔다.
*찬드라굽타2세 (Chandragupta II, 대략 376-145)는 ‘초일왕’ 이라고 불렀는데, 서인도의 사카 통치자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문치와 무용이 한때 절정에 이르렀다. 중국 동진의 고승인 법현이 인도에 건너가 불법을 구하던 기간에 마침 그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그가 지은 ‘불국기’에는 굽타 왕조의 ‘백성들이 크게 즐거워한” 태평성세의 풍경을 기록하고 있다.
*쿠마라 굽타 1세 (Kumaragupta I, 대략 415-455) 도 마제를 거행
*스칸다 굽타 (Skandagupta, 대략 455-467) 도 역시 ‘초일왕’이라고 불렀는데, 일찍이 엽달인 의 침범을 물리치고 제국의 통일 지켜냈다.
*스칸다 굽타 이후 외우내환이 빈번하게 발생, 국력이 나날이 쇠약해졌다.
쿠마라굽타 2세, 부다굽타, 나라심하굽타 등 후기 굽타의 여러 왕들은 점차 마가다의 한쪽 귀퉁이로 밀려나면서 유지했는데, 나라의 운명이 6세기 중엽까지 이어졌다. 인도 예술사로서의 굽타 시대는, 일반적으로 320년부터 600년까지로 여겨 지고 있다. 이후의 역사는 후굽타시대라고 일컫는다.
*마제: 고대 인도의 최고 제사의식- 일반적으로 국왕이 직접 주재했는데, 의식이 길게는 몇달 동안 계속되었다. 의식은 브라만의 지도자가 말을 물에 씻기는 의식으로 시작되었다. 가장 우수한 말을 골라 재계시키고, 아울러 제단에 불을 붙인다. 동시에 국왕이 전국의 정예 무사들을 거느리고 채비를 갖추어 기다리고 있다가, 새벽에 브라만이 말의 고삐를 풀어주어, 그 성스러운 말로 하여금 대지 위를 자유롭게 내달리게한다. 그러면 국왕의 무사들은 곧 그 뒤를 바짝 뒤따르는데, 그 말이 거쳐가는 곳이 만약 본국의 영토이면 곧 그 지역 백성들에게 제사를 거행하도록 하고, 만약 적국의 영토이면 그 국왕이 무사들을 지휘하여 용맹하게 적을 살해하여, 적들이 항복하든 혹은 국왕이 전쟁에서 지든,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어디까지라도 달려갔다. 그러다 어느날이 되어, 브라만이 “중지’라고 외치면 국왕은 비로서 부하들을 잔득 거느리고 조정으로 돌아간다음, 이말을 죽여 신에게 제사 지내고, 천하에 큰 잔치를 벌였다. 전설에 따르면 마제를 백 번 거행한 다음에는 국왕이 천신을 통치하는 권력을 갖게 된다고 한다.
◀ 링감과 요니.
굽타 시대는
인도의 종교.철학.문학.예술 및 과학 등 고전 문화가 전면적으로 번영한 시대
- 굽타 왕조의 200여 년동안의 정치적 통일은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가 쇠망한 이후 소국들이 분립되고, 이민족의 통치로 분열되어 있던 혼란 국면을 마감하고, 통일된 인도 문화의 형성을 촉진.
- 굽타 제국의 발달한 경제, 특히 서양 여러나라들과의 해상무역은, 거대한 사회적 재부를 축적하게 하여, 인도 문화의 발전을 위한 풍부한 물질적 기초를 다졌다. 굽타 문화는 쿠샨 시대의 외래의 색채를 띤 문화를 계승함과 동시에, 한층 더 인도 본토의 문화 전통을 고양시키는 데 힘을 쏟아, 인도의 고전 문화를 최고 전성기로 끌어 올렸다.
- 불교는 이미 인도 본토에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브라만교는 이미 흰두교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 굽타의 여러 왕들은 대부분 흰두교를 신봉, 흰두교의 대신인 비쉬누를 숭배 했지만, 불교 등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관용 정책을 취하여, 다른 종교를 믿는 신도들도 똑같이 조정의 요직에 임명될 수 있었다.
◀ 비쉬누의 와라하 또는 바라하
전통 브라만의 6파 철학 (미맘사파, 베단타파, 삼키야파, 요가파, 니야야파, 바이세시카파)이 점차 체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중기 대승불교 철학의 요가행파(Yogacara)도 최고 수준의 경지에 까지 발전하였다.
- 브라만교가 사용하는 신성한 산스크리트어를 공식 언어로 존중하여, 고전 산스크리트어 문학이 흥성하게 하였다.
- 인도의 민간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양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위대한 바라타 왕조’와 ‘라마야나(Ramayana) :’라마 왕의 일대기’ 및 몇 부의 주요 신화.전설집인 ‘푸라나(Purana)는 대략 모두가 굽타 시대 전후에 잇따라 산스크리트어를 이용하여 씌어진 정본들로, 흰두교 성전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 여러 왕들은 문학과 예술을 애호하고 장려하며 발탁.
- 산스크리트어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카리다사Kalidasa, (대략 5세기에 생존)는 ‘인도의 세익스피어’ 라고 불리는데, 그는 굽타 왕조의 ‘초일와’궁전의 ‘구보’ Navaratna: (찬드라굽타 2세 시기 무렵에 활동했던 아홉명의 뛰어난 궁정시인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 가운데 한명이었다. 그가 지은 시극 <추억의 샤쿤탈라>에는 궁녀와 국왕 본인은 모두 회화에 뛰어나다고 묘사되어 있으며, 그의 서정시인 <메가두타 Meghaduta: 구름의 사신 이라는 뜻> 에서 유배당한 한 약사가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붉은색 진흙을 이용하여 바위 위에 그녀의 뽀로통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음을 언급.
- 위로는 궁정에서부터 아래로는 민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인도 고전주의 예술의 황금시대라고 찬양받고 있다.
- 불교 예술이 한창 흥성하고, 희두교 예술은 왕성하게 발흥하여 뛰어난 작품들이 나왔고, 유파들이 잇달아 나타났으며, 건축의 형상과 구조. 조가의 양식.회화의 풍격은 모두 인도 고전주의의 심미 이상과 예술 규범을 확립했다. 카리다사로 대표되는 고전 산스크리트어 문학 정신과 일치되게, 굽타 고전주의 예술은 인도 예술의 풍격이 명확하고 유창하며 순박하던 것에서 자질 구레하고 복잡하게 과장하여 묘사한 것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의 중간에 놓여 있었다.
‘파드마파니보살’(연화수보살)도 ,460~480년경(벽화부분) ,
아잔타 제 1굴의 벽화, 인도 아우랑가바드 인근 레나푸르마을
아잔타 석굴은 6세기가 넘는 기간동안 바위에 조각된 것으로, 수도하는 승려의 거처와 경배의 장소 역할을 하였으며, 이 지역을 여행하는 순례자, 승려들, 장인, 상인을 통해 불교교리를 전파할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 석굴들은 기원전 200년과 기원후 650년 사이에 장식되고 조각되었으며 대부분의 작품들은 부처의 삶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파드마파니 보살’ 벽화는 현재 후기 벽화중 하나이며 그 시대의 빼어난 고유양식을 잘 보여주는 그림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벽화에는 당시 인도 미술의 특징이 아닌 사실적인 묘사에 대한 이례적인 시도가 였보인다. 화가는 빛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주인공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했다. 녹색, 검은색, 붉은색 천연 안료들은 회벽이 덧발라진 표면에 칠해졌다. 얇은 검은색 윤곽과 섬세한 얼굴 표현이 깊고 감정적이며 전면적인 효과를 창출하며, 통통한 입술, 가는 허리와 코, 구불구불하게 늘여진 눈썹, 연꽃 모양의 눈은 명상적인 특성을 강조해준다. 이 보살 그림은 이상화되긴 했지만, 여기에는 사실적인 접근이 두드러지며 굽타 고전 양식의 완벽한 예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아잔타 제 17굴 벽화 ‘베산타라 본생’ 혹은 우다인의 출가’, 470년경
비스반타라(Visvantara)자타카는 불교의 보살임을 알기 쉽게 보여준다. 이야기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전생의 이야기이다. 부처는 제튜타라 왕국의 산자야왕과 퓨샤티왕비 사이에서 왕자 비스반타라로 태어났다. 비스반타라왕자는 어린 시절부터 누구든 자신이 가진 것을 원하는 이들에겐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관대함과 따뜻한 성품을 지녔다. 한번은 이웃 카링카왕국에 비한방울 내리지 않아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자비로운 비스반타라 왕자는 자신의 왕국에 늘 풍족한 비를 내리도록 축원하는 신성한 힘을 지닌 코끼리를 카링카 왕국으로 보내 비를 축원하게 한다. (이하생략)
맨 왼쪽 파라솔 아래의 키가 크고 검은 남자는 비스반타라왕자이다. 왕자가 왕국을 떠나기 위해 성문을 나서려는 장면이다. 왕자는 푸르스름한 색채로 표현되어서 성스러운 인물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왕자의 약간 비스듬히 묘사된 얼굴의 표정은 단순하지만 자비로 가득하다.
굽타의 연철 원주 4세기, 델리 ◀
, 초기 왕조의 고풍식 예술처럼 그렇게 질박하고 경직되지도 않았고, 또한 중세 말기의 인도 로코코 예술처럼 그렇게 겉만 화려하게 번잡하지도 않았으며, 문아함과 질박함을 함께 중시, 외양과 정신을 겸비했다. 따라서 소박하면서도 화려, 장엄, 우아, 정도의 파악이 적당, 수준이 꼭 알맞음. -> 이러한 이유로 전무후무한 본보기가 되었다.
과학 : 인도의 전문역법 및 수학은 모두 세계적인 수준이었으며, 인도의 야금술도 놀랄 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찬드라 굽타 2세 시기에 주조한 , 비쉬누가 타고 다니는 가루다에게 제사 지내는 연철 원주는 높이가 7.25미터이고, 무게는 6.5톤으로 지금 델리 부근에 우뚝 솟아 있는데 1500여 년동안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여전히 새것처럼 반짝이고 있으며, 지금까지 녹이 슬지 않아, ‘델리의 손잡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것은 굽타 시대 금속 공예의 탁월한 수준을 상징할 뿐만아니라, 또한 굽타 예술이 이룬 불후의 성취를 대표한다.
인도 전통 미학의 미론과 화론
베다 시대나 우파니샤드 시대의 종교 전적들 안에, 바로 인도 미학 사상의 맹아가 잉태되어 있었다.
기원전 2세기에 파탄잘리(Patanjali)가 지은 ‘마하바스야 (Mahabbasya)와 서기 151년에 루드라다만(Rudradaman: 사카왕조의 통차자로, 서부 인도를 다스렸다) 이 기르나르(Girnar)에 새겨 놓은 명문에서는 이미 ‘미’속성’ ‘장식: alankara)’등의 미학 개념들을 언급하고 있다.
서사시인 ‘라마야나’의 몇몇 단락들도 작자가 ‘미론’의 최초의 형태와 유사한 시학에 정통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렇게 산스크리트어 전적들 속에 산발적으로 보이는 미학 사상의 맹아는, 비록 잔존하는 진귀한 문장이나 서화들처럼 매우 진귀하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한 체계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인도 미학 사상의 이론화와 체계화는 굽타 시대 전후에야 이루어졌다.
인도 전통 미학의 최초의 경전 저작인 ‘나티야샤스트라’는 바라타(Bharata)가 지었다, 대략 2세기부터 5세기까지 책으로 만들어졌다. 산스크리트어의 ‘natya’의 원래 의미는 ‘희극’. ‘춤’. 무용극’인데, 이 때문에 ‘무론, ‘희극론’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나티야샤스트라’: 춤과 음악을 포함한 연극의 연기 이론을 전면적으로 논술하고 있으며, 계통적으로 ‘미’와 ‘정’이라는 한쌍의 서로 관련이 있는 미학 범주를 제시했다. ‘미’, 즉 산스크리트어 rasa(라사)는 원래 ‘즙액’ ‘좋은맛’등을 의미, ‘나티야샤스트라’ 시대에 유행했던 의학 용어로서, 그 뜻은 몸의 선 (호르몬 등을 분비하는 생명체의 신체기관- 옮긴이_에서 실제로 분비되어 일으키는 일종의 생리 현상-심리 상태-을 가리킨다. 현대의 미학자들은 ‘미’를 심미적 경험 혹은 심미적 유쾌함으로 해석하고 있다.
‘정’, 즉 산스크리트어 ‘ bhava(브하바)는 원래 ‘정감’. ‘표정’등을 의미한는데, ‘나티야샤스트라’에서는 특별히 연극 연기의 개별적인 심미 정감의 상태 혹은 구체적인 표현수단을 가리키며, 연극 언어와 형체의 동작 및 마음속에서의 정감 활동의 표현을 포함한다. ‘나티야사스트라’에서는 연극의 총체적인 심미 정감의 기조를 다음과 같은 8가지의 ‘미’로 귀납해 냈다. 즉 연정, 해학, 연민, 분노, 용맹, 공포, 증오, 기괴. 성애미(애로틱한 미)는 8가지 ‘미’가운데 으뜸을 차지하는데, 이로부터 인도 고대의 생식 숭배의 관념이 이미 미학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와, 가장 중요한 심미 정감의 기조로 승화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8가지 ‘미를 49가지의 ‘정을 귀납해 냈으며, ‘미’는 각종 ‘정’들이 결합하여 생성된다고 여겼는데, 바로 단맛. 짠맛. 쓴맛.매운맛.신맛.떫은맛 등 6가지는 서로 다른 재료, 소채 및 기타 식품들이 결합하여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연정미: 남녀가 사랑하고 서로를 생각하는 각종 ‘정’들
‘미’와’정’은 실질적으로 모두 심미 정감에 속하지만, ‘정’은 개별적.부분적.외재적인 심미 정감.
‘미’는 종합적. 전체적.내재적’인 심미정감이다.
정은 미이고, 미는 정이며, 정은 외재적인 미의 표현이고, 미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정이다.
미와 정에 대한 서술은, 실제로는 심미 주체에 대한 종합적인 심리 분석을 제공해 주었다.
‘나티야샤스트라’: 인도 전통미학의 핵심- 인도 예술의 표준이자 보편적 법칙, 연극. 춤. 음악과 시가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회화. 조소등 조형 예술에 까지 확장하여 적용되고 있다.
고대 인도의 회화는 대부분 사사성: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성향)회화에 속하는데, 서사성 회화들 속에서 각종 희극성이 풍부한 정감에 대한 표현은 연극 속에서의 연기정신과 서로 통한다.
◀아잔타 제 17굴 내부의 열주에 그려져있는 채색 그림
인도 전통미학의 관점: 미론은 인도의 모든 예술 형식의 배후에 있는 공통된 원리여서, 회화의 ‘미’와 ‘연극의 ‘미’는 단지 형식적인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인 차이는 없고, 모두 정감의 표현을 통해 관중들을 감화시켜 가는 것이다. 회화의 ‘미’는 회화의 총체적인 심미 정감의 기조이며, 회화의 ‘정’은 이러한 심미 정감의 기조를 표현하는 구체적인 조형 수단이다. 예를 들어 녹색은 연정을 나타내고, 백색은 해학을 나타내며, 회색은 연민을, 홍색은 분노를, 오렌지색은 용맹을, 흑색은 공포를, 남색은 증오를, 황색은 기괴를 나타낸다.
이러한 색채심리학은 자못 음미할 만하다. ‘나티야샤스트라’ 손동작들은 인물의 내재적 정감인 제2의 표정을 표현. ‘치트라수트라’ 회화의 원리는 철.금.은.동 및 기타 금속의 조소에 적용되며, 또한 돌과 나무와 모르타르로 제작한 조상에도 적용되는데, 이러한 원리는 춤의 원리에서 유래했으며, 무릇 춤 속에 없는 원리는 회화 속에서도 사용될 리가 없다. 8가지 속성: 위치. 비례. 공간. 아름다움. 분명함.우사함.감소.증가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회화의 구성 요소, 심미 특징, 사실성 및 입체감과 관련이 있다. ‘치트라수트라’는 선의 형상화의 속성을 강조하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윤곽선을 따라 중복되는 선을 그리거나, 운염: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혹은 중앙에서 주변으로, 아니면 주변에서 중앙으로 갈 수록 먹이나 채색의 농도가 점차 옅어지거나 짙어지게 함으로써 입체감을 나타내는 회화의 채색 기법이다. 우리말은 ‘바림’이다.)을 이용하거나, 혹은 반점을 찍는 방법을 통해, 선에 부피를 표사해 내도록 둥그스름하게 튀어나온 느낌을 갖는 성질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치트라스트라’는 생기가 넘치고 지각이 있는 형상을 높이 평가했다.
만약 잠든 자와 죽은자의 생사를 구분하여 그려 낼 수 있고, 자유자재로 울퉁불퉁하면서 고르지 않게 그릴 수 있어야 비로소 숙련된 화가이다. “마땅히 초상화는 살아 있는 것 같아, 관람자가 응시하다가 깜짝 놀라며, 우아하고 아름다워 정말로 미소를 짓는 듯하고, 형상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마치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아야, 비로소 가장 훌륭한 그림이다” 라고 생각했다.
‘치트라수트라’에서는 설명하기를, ‘대가는 선을 칭찬하고, 감상자는 조형을 감상하며, 여자는 장식에 호감을 갖고, 대중은 색채에 연연해 한다.
인물의 형상:
1. 제약을 받는 것 즉 자연의 복제를 말하는데, 거울 속에 비친 영상 같은 것
2. 제약을 받지 않는 것, 즉 상상적인 형상
3. 미화 즉 정감을 묘사한 것, 연정등의 ‘미’를 느낄 수 있는 것
‘미’는 회화의 영혼이며, ‘미화’는 좋은 작품에 포함된다.
굽타 시대의 아잔타 벽화의 적지 않은 것들이 바로 ‘미화’에 속한다.
칼리다사는 황금기를 대표하는 극시인 그의 대표작 <샤쿤탈라>는 독일어로 번역되었으며 이를 읽고 감동한 괴테는 <샤쿤탈라>의 서막에서 영감을 얻어 <파우스트>의 서막을 썼다고 전해 진다. - 산스크리트 희곡 작품들은 독창적인 창작물이라기보다 신화, 전설, 일화 등을 토대로 세련되게 다듬고 극화시킨 각색 물이라 할 수 있다.
◀아잔타석굴 제 1굴
◀ 탑과 입불상, 무불상시대와 불상시대의 전환점에 조성된 상징몰(19굴)
인도 전통 회화 법칙인 ‘육지(六支) 즉 여섯개의 지체(肢體), 부분 혹은 요소는, 산스크리트어 극작가이자 화가인’ 바사’시기에 이미 유행했다. 인도의 성학 경전 ’카마수트라Kamasutra)는 ‘바츠야야나’가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3세기나 4세기 중엽에 책으로 만들어졌다.
11세기 구자라트Gujarat: 파키스탄의 펀자브 주에 있는 도시) 의 주석가인 야쇼다라Yasodhara가 ‘카마수트라’에 대한 한 항목의 주석에서 한 단락의 산스크리트어 시체인 ‘슬로카 sloka’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육지’를 하나하나 열거 하였다.
- 슬로카(sloka): 고대 인도의 시 형식의 문체로, 네 구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1구는 8음절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음절 수는 모두 32개이다. 네 구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로 불경의 내용을 노래 형식으로 만든 것이어서 ‘사구계’라고도 하며, ‘송’이라고 번역한다.
“형形,양의 구별과 양量, 정情과 아름다움의 결합, 유사함과 색체의 구별, 이것이 곧 회화의 육지라네”
- ‘형’의 구별은 복수이며, 각종 서로 다른 형체를 가리킨다
- ‘양'은 복수이며, 원래 인도 철학과 논리학 용어인데, 어떤 철학이나 논리적 논점을 떠받쳐 주는 논거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각종 서로 다른 비례를 가리킨다.
- ‘정’은 즉 ‘나티야샤스트라’가 사용한 인도 전통 미학의 핵심적인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생명력이 풍부한 심미 정감이나 심리 상태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특별히 회화의.
심미. 정감 기조를 표현하는 구체적 조형 수단을 가리킨다.
4. ‘아름다움lavanya,優美’이라는 말은 소금(lavana)에서 파생되어 나왔는데,
소금은 맛있는 음식에 필요한 조미료이므로, ‘아름답다’는 것은 인도 전통 미학의 중심
명제이다. “ 맛있는것은 아름답다”
‘결합yojana’과 ‘요가yoga’ 는 어원이 같은데, ‘정과 아름다움이 결합하면 곧 ‘
미’가 나온다.
5. ‘유사함sadrsya’은 자연의 형식을 참조하거나 복제하는 것을 가리키며, 또한 화가가 이상으
로 삼는 예술적 경지와 유사하거나 혹은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6. ‘색채의 구별 varnikabhanga’이란,
글자 그대로의 표면적인 의미는 색채의 분해.분리인
데, 색체를 배분하고 짙고 옅음의 층차를 두거나
혹은 구별하여 처리하는 것을 가리킨다.
‘육지’ 가운데 ‘형’.’양’, ‘유사함’ ‘색채’는 회화의.
형체에 속하며, 외재적 속성이다.
반면 ‘정’과 ‘아름다움’은 바로 회화의 영혼에
속하며, 내재적인 본질이다.
‘육지’는 인도 전통 회화의 금과 옥조로 받들어져 왔지만, 근대 학자들의 ‘육지’에 대한 해석은 오히려 논쟁이 분분하다.
영국의 학자인 퍼시 브라운(Percy Brown)은 그의 저서인 Indian Painting (1918) 이라는 책에서, 중국 남제 때의 화가인 사혁이 그의 저서인 ‘화품’ (대략 5세기)의 서문에서 언급한 육법이 어쩌면 인도의 ‘육지’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중국학자들은 동의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인도의 ‘육지’가 형성되고 ‘카마수트라’가 책으로 만들어진 확실한 연대에 따라 추측해 보더라도 사혁의 ‘화품’보다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물며 중국의 육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운생동’과 ‘골법용필’ 두가지 법은 분명히 중국 전통의 미학에만 있는 특유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도의 ‘육지’와 중국의 ‘육법’에 관해 말하자면, 단지 숫자상으로 우연히 공교롭게도 일치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서로 상관이 없거나, 혹은 각자 나란히 발전해 온 것에 속하며, 또한 아직 더 깊이 있는 연구와 토론을 기다려야 할 과제이다.
육법: 진나라 고개지가 ‘논화’에서 서술한 회화 사상의 기초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을 체계화한 것으로, 회화에 필요한 것들과 방법들을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정리;
- 기운이 생동해야함
- 골법에 따라 최적의 붓을 사용해야 함
- 사물 자체의 모습을 잘 파악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해야함
- 대상의 종류에 따라 색을 칠해야함
- 선인들의 그림을 따라 그림으로써 그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옮겨 가야하고, 그리고자 하는 소재의 위치와 전체적인 구도를 잘 운용해야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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