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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라틴아메리카 역사 -3장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 , 4장 1492년 결정적인 해 - 르네상스 , 한국 임진왜란, 정유제란

by marieleekr 2021.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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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

 

다양한 게르만족들이 로마에 총본산을 둔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계속 유지했었던 반면 이슬람교도에게 그와 비슷한 동화는 그리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확장의 절정기에 있던 이슬람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죽은 지 8년 후에 이집트를 정복하고, 이어서 튀니지를 침공했으며, 698년에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옛 로마 제국의 수도 카르타고로부터 비잔틴 제국의 사람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의 수도 카르타고로부터 비잔틴 제국의 사람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해서 마호메트가 그의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했던 해로부터 1세기가 지난 711년 이슬람 세력은 유럽의 남부 해안가에 도달하여 고트족이 세운 스페인을 침공했다. 

 

돈 홀리안 백작은 서고트족의 로드리고 왕에 대해서 반란,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타릭에게 도움을 청했다. 로드리고 왕은 홀리안 백작의 군대가 단순한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일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슬람교도의 침공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1.고트족의 왕국들의 허약.

2.황금으로 만들어진 왕관에 짓눌린 채 무거운 망토와 고풍스런 보석을 몸에 걸치고 두마리의 흰색 노새가 끄는 상아로 딘 4륜마차를 탄 서고트족 최후의 왕 로드리고는 이 타호강가에서 벌어진 ‘8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끝난 뒤 더 이상 구아달레테에서 무어족을 막아낼 수 없었다.  

 

아랍 속의 스페인 

 

무어족은 궁극적으로 기동력이 풍부한 부족민병생활을 재빨리 청산하고 지주계급으로 바뀌었으며, 스페인의 도시로 이주하면서 문명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  군사와 농업의 기반이 마련되자 이슬람 세력은 도시를 거점으로 그들의 군사상, 농업상, 그리고 상업상의 이권을 보다 잘 관리할 수 있었다. 

 

 

 

도시들: 코르도바, 세비야, 그라나다-는 화폐경제의 급속한 발전, 생산의 상업적 가치, 관료제의 이점, 서비스 부문의 발달을 기반으로 건설되었다.  이슬람 지배하의 코르도바는 711년에서 1010년까지 스페인을 통치했던 최고의 이슬람 도시로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후기 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 2세, 3세는 스페인에서 이슬람의 지배를 확고히 할 지역으로 코르도바를 선택했다.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개방성과 배척이 아닌 포용을 원칙으로 한 지배였다.  코르도바는 이슬람 문화를 북유럽으로 보내는 도로의 구실을 했으며, 한편으로는 잃어버린 지중해의 관거 관계를 새롭게 맺을 수 있는 수레의 역할도 했다.  그리스 철학과 고전문학은 칼리프가 통치했던 스페인의 코르도바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고트족의 유럽을 향해서 다시 거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랍인이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고 있던 칼리프 시대에는 이미 그리스의 고전은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톨레도의 ‘번역자 하교’ 번역물을 새롭게 서구 전역으로 퍼뜨렸다.

남부이슬람국가: 과학, 의학, 천문학

북부 기독교 국가: 인도 힌두스탄 동화집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던 스페인은 영의 개념, 대수학을 발명했으며, 아라비아 숫자가 로마숫자를 대체했다.  종이 유럽에 소개, 면화, 쌀, 사탕수수및 야자나무도 들어왔다.  코르도바는 그리스 철학이나 로마법,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예술을 흡수, 유대교나 기독교의 신학, 그리고 이슬람교도와 함께 “성전의 민족”으로 간주된 사자들까지도 존중하도록 했다. 

<코르도바 대 모스크 이슬람 사원>

지중해 세계의 3대 유일신교, 즉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마호메트의 종교가 때로는 성공적이었지만 일반적으로 서로 대립적인, 그 오래된 상호관계를 시작했던 곳은 스페인 남부의 새로운 지역, 이슬람교도로부터 알-안달루스라고 불린  지금의 안달루시아였다. 

 

 

코르도바 대모스크 이슬람 사원

동양으로부터 : 서적, 보석, 무용가와 악사

북아프리카로부터: 노예, 황금, 곡식

당시의 이슬람 세계와 비교해볼 때 경제적으로 열등했던 유럽으로부터는 배를 건조하기 위한 목재나 무기-이교도와 무기를 교역해서는 안된다는 교황의 칙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가 들어왔다. 

 

1010년에서 1248년까지 세비야가 스페인의 이슬람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알모아데 와조: 예술과 지식의 영광, - 알카사르 대궁전-히랄다의 첨탑과 함께 세워졌다. 

스페인의 뛰어난 두 사상가  

 

마이모니데스: 의사, 아랍어로 활동한 저술가, 헬레니즘 세계의 철학과 유대교의 철학을 정충하여 탈무들 총괄하고 완성시킨 인물

아랍인 아페로에스: 아리스토텔레스를 유럽에 다시 소개한 철학자로서 종교적으로 계시된 진실과 과학적으로 검증된 진실이라는 “이중 진리”를 고찰해 보고자 했다. 

 

 

 

<코르도바 대 모스크  내부>

 

 

 

 

 

 

 

 

 

 

 

 

 

 

 

알함드라 궁전의 정원에서 속삭이는 것은 물만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를 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혐오라는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서 알함브라 궁전은 글자들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되었다. 

 

멕시코의 비평가 프란시스코 데 이카사: 그의 시에서 그라나다에서 장님이 되는 것만큼 더 큰 형벌은 없

다. 

<엘시드> 목판화 작자 미상, 스페인 1525 blob:file:///314da450-8a61-4500-8f60-7f35d2a8cf4e

 

산티아고의 길 (성 야곱)

콤포스텔라: 성인의 무덤 : 유럽인의 대순례의 목적지 

로마네스크 예술의 산물들, 수도원, 대수도원, 도서관, 프랑스에서 시작했고, 스페인을 향해서 건너가면서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최후의 전초지인 콤포스텔라의 산티아고 무덤으로 순례자들을 이끌고 갔다. 

Campus Stella - 1075~1150  찬란한 대성당의 이름 

돌깅린, 부르고뉴인, 노르만인, 영국인 (특히 영국 여성은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좋아했다)

비유하자면 오리지널 유럽 공동체 (EC) 

 

<보타푸메이로 (botafumeiro)> 

 

 

 

 

 

 

 

 

 

 

 

 

 

 

 

 

 

Gate of Glory: 12세기 서구의 자신감과 그걳에 곁들여진 정신적, 물질적 재생을 보여주는 증거물.  

 

코르테스 Cortles : 의회는 민주주의가 확대되어 발전한 결과였다. 

 

유대인 대학살 시나고그(유대인회당): 2000명의 시체가 불태워진 사건 — 콘베르소(conversos) 

 

 

 

 

 

 

 

 

 4장  1492년 결정적인 해 - 르네상스 , 한국 임진왜란, 정유제란 

 

 

 

 

 

 

 

 

 

 

 

 

 

 

 

 

 

 최후의 무어인 왕국인 그라나다를 쳐부수고 ‘레콩키스타’를 완결 

르네상스기간동안: 이탈리아와 독일이 통일을 이루지 못한 반면, 스페인은 프랑스나 영국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성취했다. 

 

중세 스페인의 법지도는 봉건영주가 부과한 사적인 계약에서부터 지방을 기반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잇었던 관습, 법적 결정사항, 국ㄱ왕의 결단까지를 포함하는, 볍률과 관습의 섬들로 가득 차 있엇다. 

 

이베리아의 3원적 문화의 특성인 유대인, 모사라베스, 무데하렛의 고유한 법령또한 포함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지방의 권리를 한 나라의 공적 볍률로 격상- 왕국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알폰소 왕 치하에서 로마법과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사상을 수용, 

 

세문화 

페르난도 3세 , 1248년 무어족의 수중으로부터 세비아를 탈취했다. 

 

통일을 향해서 

 

1280년과 1480년 사이에 변경: 확대가 멈췄을대 왕국과 왕국 사이의 국경들은 명확하게 정해졌다. 

 

로마시대의 전권은 불안과 왕족 내의 투쟁으로 인해서 크게 손상, 흑사병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스페인을 괴롭혔다. 1350년경 잔학왕 페드로의 치세기간과 일치 

페드로는 15세에 카스티야 왕에 즉위했다. 

 

1492년의 페르난도 왕고 이사벨 여왕, 작자미상 

 

정복과 영혼 P108

 

1492년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전념: 기독교 국가로의 통일, 레콩키스타(국토확장) 

카스티야난 아라곤 출신의 지휘관이나 병사들 또한 이런 비젼을 공유

 

유대인이나 무어인과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진 혼교(mestizaje)에서 배출된 다원적 정치문화경험의 계승자였다는 사실

 

수도사, 저술가, 기록관은 스페인에 그 인도적 다원문화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이나라의 문화의 특이성은 : 타자와 싸우고, 타자를 포용하고, 타자와 혼합되면서 종국에 가서는 타자를 인지하는 데에 있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언젠가 지옥이라는 것은 타인의 것이라고 했다. 

어떤 식으로 우리들은 타인과 공존할 수 있는가? 나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나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타인이 나를 보고, 나를 완성시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 식민지화의 중심적 과제가 되었다.  그것은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로마가 이베리아를 정복한뒤부터 1492년 유대인의 추방까지 스페인이 겪은 역사적 경험에 의해 이미 던져진 질문들이다. 

1492년 - 스페인이 정말로 이질적인 ‘타자’-(다른 인종, 다른 종교, 다른 문화의 사람들 ) 남북 아메리카에 대한 중요한 물음이 되었다.  어떤 정신을 가진 사람들인가? 누구인가? 

스페인을 두개로 분리: 한쪽: 정복하자

또다른 한쪽: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 “자신의 마음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쓰지 말아라.” 

 

콜럼버스는 신세계의 문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창조했던 언제나 대립적인 이 위대한 서사시의 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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