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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인도미술사 4장 4절 북인도의 여러 왕조들

by marieleekr 2021.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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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 왕조의 밀교 예술

중세기 북인도의 여러 왕조들은 정통의 아리아 문화를 받들었는데 나날이 드라비다 문화의 요소들을 흡수했다. 

 

전래 과정

 

드라비다 생식 문화 전통에서 기원한 밀교는 서남부 인도에서 동북부 인도까지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했으며, 동시에 힌두교와 불교의 신비주의 및 그 조형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팔라 왕조의 창시자인 고팔라(재위 750-770년 재위)부터 다르마팔라 (770-810년 재위), 데바팔라(810-850년 재위), 마히팔라(988-1038), 라마팔라(1077-1120 재위)까지 역대 팔라 왕조의 여러 왕들은 모두 불교를 신봉했는데 그들은 나란다와 보드가야 등지의 불탑 사원을 확장하고 증축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오단타푸라, 비크라, 마실라, 파하르푸르 등지의 불탑 사원들을 새로 건립 하였다. 이때 대승불교는 말기 불교는 이미 거의 힌두교에 동화되었으며 동시에 급격히 밀교화하여, 나란다와 비크라마실라는 이미 밀교의 학술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불교 예술에도 힌두교 예술의 요소들이 뒤섞임으로서 신비하고 복잡하며 번잡하고 자질구레한 밀교 예술의 특징이 나타났다.

 

마하보디 사원

 

팔라시대에 중수한 금강보좌탑은 답 꼭대기가 52미터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데 힌두교 사원의 시카라와 유사한 각추형 고탑이다. 탑신 위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벽감의 부조 도안들은 힌두교 사원의 외벽에 있는 번잡하고 자질구레한 조각 장식들 못지 않다.

 

마하보디 사원은 금강보좌탑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밑에서 도를 깨우친 것을 기념하는 대탑으로 대략 6세기 굽타시대에 처음 지어졌다. 현존하는 건축은 12세기 팔라시대에 중건한 것으로 1880년대 미얀마의 승려 단체가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대탑의 정사각형 기단은 한변의 길이가 15미터이며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7층 각추형 주탑은 구조가 중세기 힌두교 사원의 시카라와 유사하다. 탑꼭대기는 둥글넓적한 나사산이 둘러져 있는 개석으로 되어 있으며 뾰족한 끝은 금동 상륜과 보병 장식으로 되어 있다. 

 

기단의 네 모서리는 각각 형상과 구조가 주탑을 본뜬 소현 각탑들이 하나씩 있어 주탑을 호위하고 있다. 크고 작은 탑벽과 기단의 네면에는 아치형 창문이 있는 벽감들이 줄지어 가득 채워져 있으며 조각한 장식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기단의 면이 보리수와 마주하고 있는 벽감 속에는 오른손을 아래로 늘어뜨려 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도금한 불좌상을 모셔다 놓았다. 



나란다 사원

 

 

굽타시대에 처음 지어졌으며  팔라 시대에 나타난 나란다 남단의 대탑 주위에 높이가 약 13미터에 달하는 석탑을 추가로 건립했는데 석탑은 층을 나누고 벽감을 세운 형상과 구조가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에 있는 금강보좌탑과 유사하며, 탑신 위의 벽감 속에 있는 진흙으로 빚은 수많은 불상들은 입체적인 밀교 만다라 도안을 구성하고 있다. 

 

팔라시대의 불교 조소들도 힌두교화하고 불교화하고 있는 추세여서 불교 조상들은 힌두교 신상들과 마찬가지로 대량의 보관 불상, 다면다비의 관음 보살, 밀교의 여신인 타라, 마리치 등 여러 신들의 조상은 장식이 호화롭고 모습이 기괴하여 힌두교 신상들과 거이 구분하기 어렵다. 팔라시대의 불상들은 고전주의의 내재적 정신을 잃어갔고 힌두교  예술의 화염같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채에 물들었다. 

 

보관불좌상

팔라시대에 유행한 보관불좌상은 머리에는 보관을 썼고 목에는 영락(구슬이나 보석 등을 꿰어 만든 긴 줄)을 착용하고 있는 등 세속이 왕의 보식을 계속 사용하고 있어 힌두교의 신상과 혼동된다. 

 

이 불상은 3면이 산처럼 생긴 보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연꽃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오른 손은 무릎 앞에 늘어뜨려 다섯 손가락으로 초진인을 취하고 있는데 연꽃잎 모양의 배광 위쪽에 부조로 새긴 세 조각의 장식성 나뭇잎은 보리수를 상징하며 좡우 양쪽에는 상상의 보탑을 조각해 놓았다. 

쿠로키 하루 에서 출토된 청동 조소인 <보좌불입관>은 대략 10세기나 11세기에 만들어졌으며 현재 피트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도 역시 팔라 불상의 본보기이다. 용모, 서 있는 자세, 손 동작 및 알몸이 드러나 보이는 얇은 옷은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굽타시대 사르나트 양식의 불상과 비슷하지만 전신의 비례는 조화가 부족하고 명상하는 표정은 매우 신경질적이며 눈꺼풀과 입술은 부자연스럽게 휘어져있어 굽타식 불상과 같은 편안한 내재적 정신은 부족하다. 

 

외재적 장식 기교는 오히려 한껏 과시하고 있어 문양이 복잡한 산 모양의 보관이나 꽃처럼 생긴 귀걸이와 진주 보석으로 만든 영락은 번잡하고 자질구레하며 사치스럽고 화려하기가 왕의 의관을 갖춘 힌두교 불상과 다르지 안하. 

 

팔라시대의 불상은 수량이 많고 종류가 급증햇으며 장식이 사치스럽고 화려하고, 의식과 법도는 번잡하고 자질구레하며, 조형은 신비화하고 여성화하는 추세였다. 

힌두교 신상들에게서 보이는 다면다비(여러개의 얼굴과 여러개의 팔)의 형상이 빈번하게 출연하며, 여성적인 삼굴식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 여성화는 밀교가 여성의 성력을 숭배한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미륵보살좌상

 

 

약 11세기에 만들어졌으며 현재 피트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높은 상투 중간에 작은 탑과  줄기가 긴 용화는 미륵보살만이 갖는 특징이다. 보살의 표정은 명상을 하는 것 같지만 그다지 단정하고 조용하며 엄숙하지는 않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으며 왼손은 방석을 지탱하고 있고 어깨는 으쓱 치켜올린 채 머리를 비스듬히 하고 있으며 몸통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가느다란 허리와 피곤하고 게으른 표정과 아름답고 부드러운 손동작은 여성화된 우아한 풍채를 드러내 준다. 

 

어리 장식, 영락, 성선, 허리띠, 팔찌와 발찌는 정교하고 섬세하게 새겼으며 몸에 착 달라붙은 형식화된 옷주름은 음각의 쌍선을 표현했다. 

 

네 개의 얼굴을 가진 바즈라다라 

 

 

약 11세기에 만들어졌고 63센티미터*37센티미터*28센티미터이고 현재 뉴델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전형적인 밀교 금강승의 여성 보살 조상이다. 이 파손된 ㅂ;즈라타라 여신 조상은 얼굴이 네 개이고 팔이 여덟개인데 복잡한 머리 장식 속에는 항마인을 취하고 있는 작은 좌불상을 조각해 놓았으며 형식화된 오관의 선이 뚜렷하고 둥근 유방 상이에는 여러겹으로 된 구슬을 떨어뜨려 여성의 매력을 과시하고 있다. 

 

타라



약 11세기경에 만들어졌고 현재 뉴델리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팔라시대 밀교 여신 조상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진품으로 ‘인도의 팔 잘린 비너스’라고 불린다. 

 

타라는 원래 별을 의미하며 불교 밀종의 여성 보살인데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관음보살의 자비로운 눈물에서 화생하여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천직으로 삼았다고 하며, 장진불교에서는 도모라고 불린다. 팔과 목은 잘렸지만 삼굴식 몸매는 여전히 꽃처럼 아름답고 우아하다. 

 

반야바라밀다경, 필사본 삽화

 

 

팔라 왕조 시대의 불경 필사본 삽화는 인도에 현존하는 최초의 세밀화 유품이다. 이 종려나무 잎에 기록한 불경, 즉 패엽경 필사본은 책엽(하나의 서화 작품을 낱장으로 표장하여 하나의 책으로 삼은 것) 위에 그린 삽화는 크기가 매우 작아 높이는 대략 6센티미터나 7센티미터 정도인데 대부분은 나란다나 비크라마실라에 있던 불교화부의 비구들이 그린 그림이다. 당시 가장 유행했던 그림은 [반야바라밀다경]이다. 이 불경은 피안의 초험적 지혜인 분야는 세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모두 허황된 것이라고 인식하는 데 있다고 여기는데 이러한 지혜가 인갹화된 것이 반야바라밀다 여신이다.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리사 사원 : 태양의 신고

 

중세기 힌두교 사원의 형상과 구조에서 북방식은 아리아식 혹은 도시식이라고도 하며 다시 오리사식과 카주라호식의 두가지로 세분할 수 있다.

북방식 사원의 전형적인 특징은 주전의 위쪽에 있는 시카라의 모양이 옥수수나 죽순처럼 생긴 아치형을 나타내어 남방식 사원의 계단처럼 생긴 각추형 시카라와는 다르다. 

 

오리사 사원

 

북방식 사원의 일종인 오리사 사원은 주로 고대 칼링가 즉 지금의 오리사 지역의 바나베스와르, 푸리와 코나라크에 분포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칼링가의 동강가 왕조(750-1250) 통치 시기에 건립되었다. 동강가 왕조는 남인도 왕국의 국왕 라자라자 1세가 북쪽의 칼링가를 정복했을때 촐라 왕조에 항복하고 혼인관계를 맺었는데 이때 오리사 사원도 남인도 사원의 영향을 받았다. 

 

동강가 왕조의 여러 왕들은 독실하게 힌두교를 신봉하여 대규모로 힌두교 사원을 건립했는데 그 가운데 동강가 왕국의 국왕인 아난다 바르만 초다강가(1042-1112)가 친명을 내려 건립한 푸리의 자간나트 사원과 나라심하 데바 1세(1238-1264)가 칙령을 내려 건립한 코나라크의 태양 사원은 현재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이 되었다. 

 

오이사식 사원 구조 

 

주전과 전전으로 나눠주며 비교적 큰 사원은 무전과 헌제전을 부설하여, 주전과 동일한 증축전 상의 앞쪽에 배열해 놓았다. 

 

  1. 주전

현지에서 사용하는 용어로는 ‘레카데올’이라고 하는데 신상이나 링가에게 제사를 지내는 성소의 위쪽에 하나의 아치형 시카라-옥수수 모양의 높은 탑-를 우뚝 세워 놓았다. 탑신의 표면에는 곧은 능선들이 볼록 튀어나와 았는데 갈빗대로 수많은 옥수수 알갱이 모양의 절단면들을 구획해 냈으며 탑의 꼭대기에는 아치형 골조 나사산이 있는 아말라키 열매 모양의 둥글넓적한 개석이 힌두교의 의식에서 사용하는 물둥이처럼 생긴 보병 장식물을 떠받치고 있다. 또 맨 꼭대기에는 이 사원이 제사 지내는 신의 상징을 씌워 놓았는데 비슈누의 상징은 윤보이며 시바의 상징은 삼차극이다. 

 

  1. 전전

현지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피다데올’이라고 하는데 이는 주전과 인접한 주랑 형태의 회당이며 지붕은 네모난 계단처럼 생긴 각추형의 높은 탑이고 꼭데기 구조는 주전과 비슷하다.

 

  1. 사원의 외벽

여러가지가 복잡하게 뒤섞인 수많은 조각들로 장시갷 놓았는데 남녀 여러신들, 우거진 나무와 무성한 꼬츠 각종 동물과 기하학적 도안들이 포함되어 있다. 

 

  1. 조각

오리사의 조각은 일반적으로 성숙기의 인도 바로크 풍격에 속하며 번잡하고 자질구레하면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과 과장되게 몸을 비튼 동태를 힘써 추구했다. 특히 여성 인체미의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우아하고 풍만한 모습을 표현하는데 몰두했다. 

 

부바네스와르 

지금의 인도 동해안에 있는 오리사 주의 도시로 원래 사원도시로 유명하다, 이 도시에는 인도 각지의 신성한 강물이 호수로 흘러 모여든 성수인 빈두사가르 저수지 주위에 일찍이 7천여 곳의 크고 작은 사원이 건립했던고 하는데 지금은 5백여곳만 남아있다. 하지만 단지 10곳만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사원들은 건립 념도가 다르기 때문에 오리사 사원의 형상과 구조가 변화해 온 궤적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목테스와르 사원

 

 

대략 950년에서 975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주전의 시카라가 아치형의 옥수수 모양이며 전전은 역시 계단처럼 생긴 각주형 탐정을 지니고 있어 이미 전형적인 오리사 풍격이다. 이 사원은 작고 깜찍하며 정교하고 비례가 균형을 이루고 있므녀 장식이 조화롭다 두 개의 둥근 기둥이 지탱하고 있는 아치형 문은 특히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그 때문에 오리사 건축의 보석이라고 칭송 받고 있다

 

랑가라자 사원

 

 

중기 오리사 사원의 본보기이다. 이 시바 사원은 규모가 방대하여 면적이 158미터*142미터이며, 담장으로 둘러싸인 정원 속에 수많은 작은 신전들이 둘러싸고 있다. 주전의 아치형 옥수수 모양의 시카라는 곧게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45미터에 달하며, 꼭대기에는 시바의 삼차극이 씌워져 있다. 사원의 외벽 조각은 복잡하고 화려하며 아름답고 기이하면서도 빽빽하고 화려한데 주전의 탑신에는 사자가 코끼리의 몸 위에서 눌러 굴복 시키고 있는 조상들을 돋우어 새겨 놓았고 기단의 벽면에 돌덩이들마다 볼록 튀어나와 있는 테두리에는 모두 화초나 기하학적 무뉘를 조각해 놓았으며, 백여개나 되는 벽감 속에는 요염하고 아름다운 다양한 자태의 여성들이나 혹은 껴안고 성교하는 미투나 조상들이 있다. 

 

나이카

 

실제 사람 크기와 같은 나이카는 몸매가 날씬하고 아름다운데 눈꺼풀을 아래로 드리우고 수줍어서 어쩔 줄 몰라 하듯이 미스를 띤채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며 섬세하고 가는 손가락을 이용하여 벗겨진 사리복을 살짝 끌어올리고 있다. 투명한 직물로 만든 사리복은 그녀의 구부린

왼쪽 팔꿈치 부위에서 나부끼고 있으며 또한 벽감의 가물거리는 빛과 그림자는 그녀의 표정과 태도를 더욱 빼어나고 몽롱하게 보이도록 해준다. 

 

라자라니 사원

 

 

말기 오리사 사원의 걸작으로, 이 사원을 지은 산뜻하고 윤기가 흐르는 호박색 황사석의 명칭이 라자라니아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원의 아랫층에는 2열로 된 중첩된 옥수수처럼 생긴 작은 탑들이 전체가 옥수수처럼 생긴 주탑의 탑신을 에워싸고 있어, 주탑으로 하여금 더욱 웅혼하고 장엄해 보이도록 해주고 있는데 이와 같은 구조는 카주라호식 사원의 특징을 섭취한 것이다. 

 

라주라니 사원 외벽에 새겨진 여성 조상들은 마치 장식한 삼림 속에서 무성한 꽃들을 가득 걸어놓은 듯 하여 링가라자 사원의 장식 조각과 아름다움과 견줄만 하다. 그들은 수신, 귀부인 혹은 무희들인데 어던 것은 과일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있고 어떤 것은 연인을 안고 있고 어떤 것은 발찌를 벗고 있어 천태만상의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코나라크 태양 사원

 

 

코나라크는 산스크리트어로 ‘구석진 곳의 태양’을 으미하는데 부바네스와르에서 64킬로미터 떨어져있고 푸리의 동북쪽 약 30킬로미터 지점에 있으며 베공만에 인접해 있다. 코나라크 태양사원은 인두교의 태양신인 수리야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대략 1240년경에 동강가 왕조의 국왕인 나라심하데바 ㅂ세가 칙령을 내려 건립했으며 말기 오리사 사원의 거작이다. 태양 사원은 사석과 녹니석을 겹쳐 쌓는 방식을 채용했는데 수백년 동안 비바람에 풍화되어 색깔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흑탑’이라고 불린다. 전전층의 위층에 있는 사각의 각추형 꼭대기는 높이가 30.5미터에 달하고 층층이 겹쳐져 있으며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평판으로 된 겹처마가 세 개의 단을 이루고 있다. 두 단의 겹처마 사이마다 쑥 들어간 평대 위에 일렬로 음악천녀 환조들을 세워 놓았다. 

 

주전의 아랫쪽 세개의 측면에 있는 신감 안에는 태양신인 수리야입상 세좌를 안치해 놓았는데 각각 맑은 첫새벽, 정오, 황혼의 태양을 나타내 준다. 준전과 전전을 포함하여 전체 사원은 태양신인 수리야의 황금마차로 가상해서 만들어졌는데 기단의 남북 양 옆에 모두 24개의 화려하고 웅장한 거대한 수레바퀴를 조각해 놓았고 전전의 정문 양 옆에는 모두 일곱 필의 도약하는 준마들을 조각해 놓아 휘황찬란한 태양신의 마차를 끌고 천계에서 내달리고 있음을 상상하게 한다. 


코그라크 조각

 

코그라크 조각은 오리사 조각이 성취한 최고 수준을 대표한다. 신감 속에 있는 실제 사람과 크기가 비슷한 세 좌의 녹니석 환조인 <수리야- 옆>는 태양신이 머리에 보좌를 쓰고 정면을 향해 직립해 있는 제왕 스타일의 조형과 조각 장식이 복잡하고 자질구레한 뒤쪽 병품은 팔라 왕조의 보관불입상과 유사하다. 하지만 태양신은 발에 북방 유목민의 장화를 신고 있으며 발ㅂ밑에 소형 부조로 새긴 마부는 일곱 필의 준마가 끄는 신거를 신고 있다. 태양 사원 기단 옆에 있는 거대한 사석 부조인 <수레바퀴>는 모든 수레바퀴의 직경이 3미터 바퀴 안에는 넓은 것과 좁은 것이 각각 교체하는 16개의 바퀴살들이 있는데 좁은 바퀴살 위에는 구슬을 꿰어 장식해 놓았고 넓은 바퀴살과 바퀴통 모두 정교하고 세밀한장식 무늬나 동물 도안을 가득 새겨 놓았다. 

 

넓은 바퀴살에서 마름모꼴로 튀어 나온 중간 부분과 수레 바퀴의 바퀴통 축심에는 모두 하나씩의 원형 부조가 있는데, 각각 요가를 수련하는 남녀와 제멋대로 성교하는 미투나들을 조각해 놓았다. 불교는 거리낌없는 욕망과 고행이라는 양 극단을 피하는 '중도'를 제창하고, 힌두교는 바로 거리낌없는 욕망과 고행이라는 두 개의 극단을 병 행하면서 포기하지 말 것을 주장하는데, 탄트라 교와 성력파는 또한 '성요가'를 영혼 해탈의 첩경으로 간주한다. 코나라크 태양 사원의 수레 바퀴는 동시에 거리낌없는 욕망과 고행이라는 두 개의 극단이 인생의 윤회 속에서 교대로 순환하면서, 해탈로 나아간다는 것을 형상화 하였는데,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힌두교 문화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코나라크 태양 사원은 아마도 탄트라 숭배의 중심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사원의 기단에 새겨져있는 수레 바퀴의 양 옆에, 그리고 전전과 무전의 외벽에는 성감의 자극과 색욕의 유발로 충만해 있는 미투나 (mithuna) 연인 조상들을 대량으로 조각해 놓아, 카주라호 사원의 성애 조각들과 함께 논할 수 있다. 무전의 무너진 담벽에는 기둥과 들보가 종횡으로 놓여 있고, 빽빽하게 많이 조각해 놓았으며, 사석 벽주 들마다있는 수직 틀 안에는 거의 모두 음악을 연주하며 춤을 추는 천녀나 귀부인 조상들을 하나씩 새겨 놓았는데, 그들의 부드럽고 아름답 게 춤을 추는 각양 각색의 자태들은 중세기 오리사 사원에있는 무희 [devadasi, 즉 신의 여자]의 우아한 자태를 재현하였다. 



카주라호 사원 : 성애의 은유

카주라호는 지금의 인도 마디아프라데시 주 북부의 차타르푸르에 있으며 중세기에는 찬델라 왕조(950-1293년)카주라호도 역시 사원의 도시로 유명하며 찬델라 시대에 85곳의 사원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25곳 가량이 남아있다. 

 

찬델라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은 월신인 찬드라에서 기원했다고하는데, 이는 힌두교를 신봉하는 라지 푸트 왕족의 한 갈래였다. 

 

초기 찬 델라 왕조의 여러 왕들은 카냐쿠 브자의 프라티하라 왕조 (Pratihara Dynasty. 대략 805 ~ 1036년)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대략 925년에 처음 독립하여, 북인도에서 하나의 강대한 세력을 이루었다. 초기 찬 델라 왕조의 국왕들인 하르샤 (Harsha), 야소바르만 (Yasovarman)은 곧 카주라호에 힌두교 사원들을 건립했다. 

 

야소바르만의 아들인 당가 (Dhanga, 대략 954 ~ 1002년 재위)는 찬델라 왕조의 전성기를 열었다. 당가는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실시하여, 카주라호에 힌두교 사원을 건립 했을뿐만 아니라, 또한 자이나교 사원들도 건립했다. 

 

당가의 후계자 간다(Ganda, 대략 1002 ~ 1018년 재위)와 비디야다라 (Vidyadhara, 대략 1018 ~ 1022년 재위)는 카주라호의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몇 곳의 사원들을 건립했다. 비디야다라의 손자인 키르티 바르만 (Kirtivarman)은 당대의 산스크리트어 극작가인 크리슈나 미스라(Krishnamisra)를 장려하고 발탁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도 계속하여 카주라호 사원들을 건축하고 공양하였다. 

 

카주라호 구조

 

카주라호 사원의 형상과 구조, 즉 카주라호식은 오리사식과 마찬가지로 인도의 북방식 사원의 일종이다. 평면의 설계를 보면, 카주라호 식의 비교적 큰 사원들은 일반적으로, 현관, 회당, 주전 및 우요 용도의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부분의 구조는 동서로 향해 일직선을 이루며 한데 이어져 있고, 회당의 양 옆과 주전의 세 측면에는 모두 튀어 나온 발코니 창문이 있다. 이 때문에 다석 부분의 설계 평면은 쌍십자형을 나타낸다.

 

카주라호 사원 

 

카주라호 사원은 높고 큰 기단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탑의 성소 위쪽에는 하나의 높고 가파른 아치형 시카라-죽순 모양의 주탑-가 우뚝 서 있고 주탑 주위에는 겹겹이 주탑을 모방한 죽순 모양의 작은 탑들이 포개져 있어 층층이 겹쳐진 채 붙어서 주탑을 빼곡히 에워싸고 있으며 크고 작은 탑들의 꼭대기에는 모두 아래는 크고 위에는 작은 이중의 아치형 골조 나사산이 있는 동글넓적한 모양의 개석과 하나의 보병처럼 생긴 장식물을 씌워 놓았다. 

 

기복이 있는 윤곽이 물결 모양의 곡선을 이루고 있어 산맥이 서로 이어지고 뭇 봉우리들이 매섭게 솟아나는 것 같은 동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사원의 주전과 회당의 외벽에는 2, 3층으로 된 고부조 장식띠를 둘러놓았는데 여기에는 넘녀 여러 신들, 천녀, 귀부인, 미투나 조상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사원의 내부 장식 조각도 복잡하고 자질구레하며 화려하다.

 

칸다리아 마하데바 사원

 

 

 

카주라호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웅장하며 아름다운 사원이다. ‘카다리아’는 ‘산의 동굴’이라는 의미고 ‘마하데바’는 시바의 호칭 중 하나이다. 주전의 죽순처럼 생긴 주탑은 31미터이고 층층히 겹쳐져 있는 죽순처럼 생긴 작은 탑들이 주탑을 에워싸고 있다. 

 

죽순처럼 생긴 주탑을 애워싸고 있는 작은 정자들은 상승을 추구하는 추세를 더욱 강화해주어 한층 더 산들이 첩첩이 겹쳐 있고 뭇 보우리들이 가득 펼쳐진 것처럼 보인다. 

 

사원의 주전과 회당의 외벽 중간에는 3층 고부조 장식띠가 둘러져 있으며 장식띠 위에는 남녀 여러 신들, 사신, 천녀, 귀부인, 미투나, 괴수 등 군상들을 조각해 놓았다. 이 빡에도 모든 벽감, 기둥, 사이, 아치형 문, 보아지들마다 거의 모두 각종 군상을 조각해 놓았다 . 이 사원의 안팎에 있는 조상은 모두 872개라고 한다.  

 

카주라호 사원의 조각도 역시 성숙기의 인도 바로크 풍격에 속하여, 번잡하고 자질구레하며 호화로운 장식을 힘써 추구했고, 과장되게 몸을 비튼 동태를 매우 강조했다. 특히 적나라하게 여성 육체의 색정적인 유혹과 남녀가 성교하는 성적 자극을 과장하는데 몰두하여, 오리사 조각에 비해 훨씬 자극성과 흡인력이 풍부하다. 카주라호의 성애 조각들은 주로 각종 유혹적인 자태를 드러내는 여성 조상과 각종 성교 체위를 취하고있는 미투나 조상을 포함하고있어, 세계 각지의 호기심 많은 여행객들을 강력하게 끌어 들임으로 써, 카주라호를 인도 여행의 인기 관광지로 만들었다. 이런 성애 조각들은 락슈마나 · 파르스바 나트 · 비슈바 나트 · 데비자그담바 · 치트라 굽타 · 칸다리아 마하 데바 등의 사원들 외벽에 새겨진 사석 고부조장식띠 위에 집중적으로 펼쳐져 있으며, 일부 사원 내부의 보아지 위에도 여성 조상들을 새겨 놓았다. 

 

카주라호의 조각들에서 사원들의 외벽에 새겨져 있는 거리낌 없이 성교하는 수많은 남녀 연인들, 즉 미투나 조상들이다. 사원 외벽에는 인도의 성학 경전인 카마수트라를 펼쳐 보여주면서 [카마수트라]에 열거되어 있는 각종 성교를 마음껏 연출하고 있다. 

 

종교와 성의 기이한 병존 혹은 혼합은 고대 인도 예술에서는 결코 보기드문 것이 아니며 인더스 문명까지 거슬러 갈 수 있다. 인도의 토착민인 드라비다인의 농경문화 속에 있던 생식 숭배 전통에 근원을 두고 있다. 중세기에 성행한 힌두교 신비주의, 특히 성력파와 탄드라 숭배는 기본적으로 농경문화 전통의 생신 숭배가 형이상학화하고 의식화한 형태에 속한다. 

 

카주라호 사원 성애 조각 출현의 원인

 

카주라호는 찬델라 시대의 탄트라 숭배를 거행하는 광희 의식의 중심지였다. 탄트라교는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는 남성의 본질과 여성의 본질이라는 두가지 성질을 띠고 있으며, 인체는 우주의 축소판이고 남녀의 양성 성교는 우주의 양극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은유한다고 주장한다. 탄트라를 수행하는 최종 목적으느 양극의 대립을 그복하고 이원화되지 않은 상태에 도달하여 영혼이 해탈한 극락 혹은 환희를 획득하는 것이다. 남녀의 성교는 이원화되지 않은 상태에 도달하는 첩경인데 [카팔리카파]의 한 경정에서는 주색에 빠지는 것을 통해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공헌한다. 

 

이 때문에 탄트라 숭배의 성의식으로 변했는데 이와 같이 성의식 속에서 남성의 수행자는 그 자신을 바로 남신으로 상정하며 그의 여성 배우자는 바로 여신으로 상정된다. 





서부의 자이나교 사원과 회화

북인도 서부의 솔랑키 왕조 (Solanki Dynasty, 대략 962 ~ 1297년)는, 그 창시자인 무라라자 (Mularaja)는 원래 데칸 지역의 찰루키아 혈통에 속했는데, 아흐메다바드 (Ahmedabad)의 서북쪽에있는 파탄 (Patan)을 수도로 삼고, 구자라트 (Gujara)와 라자스탄 (Rajasthan)의 서부를 통치했다. 이 지역은 하나의 문화 단위를 형성하여, 중세기 북인도 예술의 서부 분파를 대표했다. 

 

솔랑키 시대에 구자라트와 라자스탄 사원의 형상과 구조는 중세기 인도의 북방식 사원의 변형체로, 겉모습과 배치면에서는 카주라호 사원의 몇가지 특징을 흡수했지만 내부 구조 특히 장식 조각 면에서는 복잡하고 경쾌한 지방적 풍격을 나타내고 있다. 

 

솔랑키 왕조의 여러 왕들은 대부분 시바교를 신봉했으며 또한 자이나교도 지지했다. 

 

국왕인 쿠마라팔라와 일부 관리들은 자이나교를 신봉하여 적지 않은 자이나교 사원을 건립했는데 이것은 힌두교 사원과 풍격이 일치한다. 

 

비말라 바사히 사원

 

 

라자스탄의 아부 산에 있는 딜라와 사원군은 인도 자이나교의 본보기들이다. 딜라와 사원군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지어진 비말라 바사히 사원은 대략 1032년에 비마 1세의 장군이었던 비말라가 지었으며 자이나교의 개산조사인 아디나트에게 제사 지내는 사원이다. 





루나 바사히 사원

 

1231년경 솔랑키 왕국인 비라드하발라의 부유한 대신들인 바스투팔라와 테자팔라 형제가 지었으며 자이나교 제22대 조사인 네미나트에게 제사 지내는 사원이다. 

 

이 두 자이나교 사원은 모두 백색 대리석 건축인데 외관은 비교적 간경하고 소박하며, 지붕은 각추형도 있고 반원형도 있다. 그리고 내부 조각 장식은 화려하고 우앙한데 열주, 뱀 모양의 보아지, 아치형 문과 찬장이 줄지어 있고 층층이 이어지면서 중복되는 인물, 동물, 혹은 화조를 새긴 부조 장식 띠들이 가득 널려 있다. 

 

이 대리석 부조 장식띠는 정교하고 세밀하며 환조에 가까운데 마치 금속 세공 장식품이나 그물 모양의 직물 도안 같다. 

 

전해지기로는 줄칼로 갈아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비말라 바사히 회당 내부는 8개의 줄지어 있는 팔각형 열주가 빙빙 돌면서 상승하는 원정 울 자탱하고 있으며 원정에는 11바퀴의 부조 무늬가 있는 테두리를 가진 장식띠가 중시에서 바깥으로 향하여 한바퀴 한바퀴 동심원을 그리면서 기복을 이루고 있고 투각한 대리석 꽃봉우리가 아래로 드리워진 장식은 마치 한 무더기의 수정 가지가 있는 상들리에처럼 생겼다. 이 거대한 직물처럼 눈부시게 현란한 원정은 한 덩어리의 옹근 대리석을 조각하여 만든 것이다. 

 

후세의 인도 이슬람 건축도 자이나교 사원의 이처럼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을 흡수하였다. 



[칼파수트라] 필사본 삽화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구자라트 지역에서 유행한 자이나교 경전 필사본 삽화는 동부 뱅골과 비하르 지역의 팔라 시대 불경 필사본 삽화와 유사한데 모두 인도 본토의 전통적인 초기 세밀화 유파에 속한다.

 

구자라트는 얘로부터 자이나교의 부유한 상인들과 고관대작의 찬조를 받아 구자라트의 자이나교 세밀화는 특별히 번영했는데 이를 구자라트 학파라고 부른다. 

 

이 자이나교 세밀화는 최초에는 종려나무 잎이나 나무 재질의 표지 위에 그렸으며 1370년 후에야 비로소 점차 보편적으로 종이를 이용하여 그렸다. 구도는 간명하고 단조롭고 선은 개괄적이면서 포괄적이고 부드럽고 강인하며 색채는 단순하면서 농염하고 배경은 일반적으로 큰 면적에 평도한 붉은색이나 남색이며 복식과 기물 등은 소량의 황색, 백색 및 녹색을 섞어 사용하여 전체 화면은 평면감과 장식성이 풍부하다. 인물은 형식화 되어 있는데 어깨는 넓고 허리는 가늘어 형상이 마치 그림자극 같다.









마하비라의 탄생




박주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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