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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예술, 역사를 말하다- 그리스인들

by Color_of _Origin 2025.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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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를 평정하고 이탈리아의 나폴리, 프랑스의 마르세유, 스페인의 말라가를 건설했던 아테네 상인들의 흔적이 그 고장에 그대로 남았던 것.

그리스 신화는 중세 시대 비잔틴 제국 학자들의 기록에 의해 살아남았으며, 특히 인간사의 갖가지 갈등을 은유하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여러 신들은 화가들의 창조력을 자극했다.
비너스 (아프로디테) 소재로 하면 당시 금기시된 여성의 누드를 그릴 수 있었다는 점이 화가들에게는 매력적.
르네상스와 바로크시대 화가들은 비너스의 풍요롭고 부드러운 육체, 또는 바람둥이신 제우스의 아슬아슬한 연애 행각들을 화폭에 담았다.

라오콘 군상은 트로이 신관 라오콘 그의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는 장면을 묘사한 고대 그리스 조각상이다. 이 작품은 1506년에 로마에서 발굴되어 바티칸 미술관에서 대중에 공개된 이후 가장 유명한 그리스 조각 중 하나가 되었다.[1] 이례적으로 플리니우스 극찬한 조각상과 매우 비슷하다.[2]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바다 뱀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인물들의 크기는 실제 인간의 크기보다 크며, 높이는 10미터가 약간 넘는다[3]

이 군상은 서양 미술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원형적 상징이었으며예수의 수난이나 순교를 나타내는 기독교 예술에서 묘사되는 고통과는 달리, 이 군상의 고통은 어떤 속죄의 힘이나 보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4] 고통은 일그러진 얼굴 표현으로 나타나며, 분투하는 몸체, 특히 모든 부분이 뒤틀리는 라오콘의 몸체와 조화된다.[5]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한 것을 본 아폴론은  비록 네가 나를 싫어해서 나무로 변했지만 결코 내 곁을 떠나지 않게 하겠다 면서  월계수 를 성수로 삼아 그녀의 이파리로  리라 를 장식하고  월계관 을 만들었다 .  기껏  스토커 를 따돌렸더니 자길 가지고 악기를 장식하느니 관을 만드느니 하는 걸 본 다프네 입장에선 능욕이 따로 없지만   올림픽  등 각종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월계수 잎으로 만든 관을 씌워 주는 것도 아폴론이 다프네를 기리기 위해 만든 전통이라고 .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1828-1882)는 초기 이탈리아 회화미술에 보이는 원시적인 특성들을 옹호했던 라파엘전파의 창립 멤버였다. 고대 신화에서 페르세포테는 농업의 신 데메테르의 딸이었으며 매우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그녀를 보고 반한 명계의 신 하데스는 황량한 자신의 영토로 그녀를 납치했다. 이에 격분한 데메테르는 딸을 돌려주지 않으면 땅 위의 모든 곡물이 자라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데스를 위협했고, 페르세포네가 잡혀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그녀를 풀어 주겠다는 조건으로 마침내 이 둘 사이에 협상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석류씨 네 개를 먹었던 페르세포네는 매년 넉 달 동안을 하데스의 신부로서 명계에 머물러야만 했다. 이 그림은 명계에 머무르고 있는 페르세포네를 보여준다. 잃어버린 자유를 일깨우는, 한 줄기 광선이 좁은 틈을 통해 지하세계로 들어와 있으며 그녀는 수심에 잠겨있는 듯 보인다. 로세티는 이 그림을 여덟 개의 버전으로 그렸다. 이 주제는 로세티에게도 개인적으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 그림 속 페르세포네의 모델이었던 제인 모리스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그녀는 이미 로세티의 동료 화가인 윌리엄 모리스와 결혼한 상태였다 . 로세티는 페르세포네 신화와 자신의 상황을 동일하게 취급하였고 페르세포네가 명계에 갇혀 있는 시간을 제인이 남편과 보내는 시간에 비유했다 . 페르세포네의 우유부단함은 자세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 한 손으로 운명을 결정짓는 석류를 들어 입으로 가져가고 있으며 다른 한 손으로 그 손을 제지하고 있다 .

루트비히 벤토벤 (1770-1827)

1770년 12월 17일, 쾰른 선제후국의 수도  시에서 태어났다. 1597년부터 쾰른 선제후들은 시민들의 영향력이 강한 쾰른을 버리고 인근의 본에서 거주했다. 비슷한 예로 트리어 선제후들도 프랑스의 간섭을 우려하여 프랑스와 가까운 트리어를 버리고 코블렌츠에서 머물렀다. 정확한 생일은 기록이 없지만, 유아세례를 1770년 12월 17일에 받은 기록이 있으므로 그 시기에 태어난 것으로 흔히 추정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태어난 다음날 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아서 세례 전날인 12월 16일을 실질적인 생일로 보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할아버지 루트비히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독일로 이주하여 쾰른 선제후 궁정의 악장을 지냈다. 아버지 요한도 자신의 아버지(베토벤의 할아버지)를 따라 음악의 길을 걸어서 궁정 가수가 되었지만 잦은 폭음으로 결국 목소리가 썩어버렸다. 요한은 심한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심지어 아들이 연주회 등에서 벌어온 돈도 술값으로 다 탕진했을 정도. 술버릇도 고약해서 평도 그리 좋지 않았다. 반면 할아버지는 건실한 사람이었으며, 어린 손자 베토벤을 귀여워해줬지만 그가 4살 때인 1774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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